목포 행남사와 김준형 회장 (46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식구들은 목포에서 오래 살았었다. 부모님께서 호주에 이민 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목포에 들러 행남사 김준형(작고) 회장님도 만나보고 오셨다고 했었다. 아버지와 김준형 회장님의 관계는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철공소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행남사의 기계 수리, 제작, 기타 공장 일들을 도맡아 하셨었다. 김 회장님 역시, 8남매를 교육시키면서 부지런하게 사시는 아버지를 남달리 좋게 여기시기도 했다. 그뿐인가? 내가 대학교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중단할 상황에서 김 회장님이 선급해주시어 내 등록금을 마련한 적도 있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행남사 김준형 회장

더욱이 행남사는 목포를 대표할 만큼 6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큰 기업이었고, 적어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도자기 제조회사였다. 또한, 아버지와 김 회장님께서 ‘미래 요업’에 대해 대화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요업을 전공하게 된 것 아닌가? 그런 인연들을 살펴, 김 회장님께서 나한테도 안부를 전하셨다고 했다.

게다가 내가 호주대학교에서 다시 요업을 전공한다 하니, 김 회장님께서 나한테 관심이 많더라고도 하셨다. 나보고 편지하라고 하셨다기에 나는 김 회장님께 정중히 안부편지를 올렸다. 김 회장님께서 ‘부모님 잘 모시고 혹시 한국에 올 일 있으면 행남사에도 연락하라’고 짧은 답장도 보내주셨다. 그리고 한동안 그분을 잊고 지냈다.

▲ 1942년 창업 당시의 행남사 전경과 작업 광경

나는 호주 요업학회 회원이다. 학회에서 가끔씩 미스터 존 쿠퍼(Mr. John Cooper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쿠퍼 씨는 시드니 근처에서 K.C.산업(K.C. Industries)이라고 하는 전기 애자 제조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었다. 전기 애자(Electrical Insulator)는 고압 전기에서 저압 전기로 전환하는 전기 절연체를 말한다. 공장 전체를 자동화하여 그분이 유일하게 그런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었고, 단순품목으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회사규모는 아주 작지만, 수입도 짭짤해 보였다.

그 회사의 실험실장은 체코 난민이었다가 호주에 이민 왔으므로 이민자들의 설움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미스터 피터 스바보다(Mr. Peter Svavoda)였다. 그 사람은 원료를 잘 조절하여 대치하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가끔 쿠퍼 사장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존 쿠퍼(Mr. John Cooper ) 사장과의 인연

쿠퍼 씨에게는 내가 요업(Ceramic)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것, 화울러라는 큰 회사에서 점토 주입(Clay Slip) 조정 일을 한 것, 그 무렵 내가 ACI 기술연구소에서 도자기 압축 성형(Pressing Ceramic) 기술을 개발 중인 것도 모두 관심의 대상이었다.

K.C 회사에서는 모든 제품을 성형으로 생산하고 있었는데, 습식 프레싱(Wet-Pressing)이라는 전통 방식에서 건조 성형으로 대체할 수 있으면 생산비용이 상당히 절감될 수도 있었다. 그 제품 중에서 단순품목은 성형기술로 감당이 되지만, 복잡한 품목은 주입 성형(Slip-Casting) 기술로 제작해야만 했다.

내 경력상 화울러 회사에서는 주입 성형이, ACI 연구소에서는 건조 성형기술이 해당되었으므로 쿠퍼 사장은 더더욱 내가 자기와 함께 일하기를 원했지만, 그 정도 규모의 공장으로 옮기기 위해서 ACI 연구소를 떠날 수는 없었다. 대신 토요일(8시간) 파트타임과 주중 퇴근길에 들러서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실험실 일을 돕기로 했다. 그러니까, 별도로 일주일 당 8~16시간 정도 그 회사의 일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따라서 K.C 회사에서 일하는 만큼의 별도 수입이 생겼고, 그것 역시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자리도 부탁했는데, 아버지는 특별 품목 제조 시 점토 주입 성형(Clay Slip Casting) 담당자로 취직이 되었다. 주입(Slip) 조정을 위해 내 경험을 피터(Peter)에게 알려주고, 한국말로 제조 절차를 따르는 순서로 했다.

아버지는 평생 공장 일을 하셨던 분이고 비교적 두뇌가 영리한 편이었는데, 주입 성형 일을 손쉽게 척척 해내셨다. 결국, 우리 집에서는 세 사람이 직업을 갖게 된 데다, 나는 별도로 파트타임 일까지 했기 때문에 그전보다 생활이 다소 윤택했다. 아침에는 세 사람이 동시에 출근하여 먼저 아버지를 K.C 회사에 내려드리고, 시내까지 아내를 데려다 준 후, 마지막으로 연구소에 출근했다.

현진이 동생을 출산할 무렵에 아내는 직장을 사퇴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버지는 매주 받는 급여 일부를 우리 생활비로 보태주셨다. 어머니는 현진이가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보살펴주셨고, 뒷마당 텃밭의 채소와 달걀 등도 가계에 보탬이 되었다.

쿠퍼 사장에게 한국의 행남사를 소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쿠퍼 사장에게 한국기업과의 사업에 대해 제의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행남사의 규모, 역사, 수출 품목, 기타 상세한 사항을 알려주었다. 만일 쿠퍼 사장이 한국과의 사업에 관심이 있으면 내가 김준형 회장님께 전해주겠다고 했다.

쿠퍼 사장은 유태계 호주 인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았지만, 참으로 검소하고 낭비 없이 철저한 경영 관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과의 사업을 제안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나에게 “일단 한국 행남사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바둑으로 치면 정석을 둔 셈이다.

나는 행남사 김 회장님께 아버지의 근황도 알려드리면서 K.C 회사 쿠퍼 사장에 대해 말씀드렸다. 장차 쿠퍼 사장이 호주에서 행남사 제품을 수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으니 그 전에 행남사를 방문해도 좋겠느냐고 여쭈었다. 김 회장님은 따뜻하게 답장을 보내주셨다.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보시면서, 부모님 모시는 일이 정말 어려운데 더구나 외국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해 너무나 고맙다는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편지 끝 부분에 쿠퍼 사장 한국 방문 건은 담당 부서장한테 지시해 놓았으니 곧 연락이 갈 거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쿠퍼 사장에게 행남사 김 회장님의 편지 내용을 알려주었다.

한편, 구의두 목사와 약속한 집값을 제날짜에 꼬박꼬박 송금해 드렸다. 구 목사는 무리하지 말고 형편에 맞춰 돈을 갚으라고 당부하셨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하루속히 빚부터 갚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인 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H 목사는 교회 사역에 최선을 다했고, 나는 H 목사와 장로교단 사이의 중간 임무를 수행했다. ACI 연구소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차질 없이 완료했으며, K.C 회사의 파트타임 일도 계속했다.

아내의 병치레

아내는 여전히 호주 의류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전, 아내로부터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꺼져가는 목소리였다. 그날따라 연구소에 사정이 생겨서 아내는 기차로 출근했었다. 시드니 중앙역에서 회사로 걸어가던 중, 신발이 돌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더는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회사 동료를 만나 시드니병원에 가서 깁스를 한 상태라는 것이다.

사고현장과 내 연구소는 자동차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퀵 박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고 급히 병원으로 가보니 아내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의사 말이, 발목에 금이 가서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려워 석고 처리를 했다고 했다. 그 사고 후 아내가 한 달 동안 휴직하게 되어 현진이는 마냥 즐거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