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이 계시는 NSW 대학교는 우리 연구소와 자동차로 10여 분 정도 거리에 있었으므로 일찍 조퇴하고 바로 달려갔다. 오후 4시경, 이번에는 더 단단하게 굳어있는 샘플을 들고 교수님 연구실을 노크했다. 교수님은 집필 중이신 듯했는데, 방문을 열어주시며 내가 누구인지 먼저 확인부터 하셨다. 나는 미리 전화를 드리지 않고 갑자기 방문한 것을 정중히 사과했다. 자칫 전화로 대화하다가 잘못 표현할 수도 있어서였다.
교수님께서는 일단 반갑게 맞이하며 말문을 여셨다.
나도 호주에 간 지 7년이 지난 터라, 영어실력이 유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대화를 쉽게 이어갈 정도는 되어 있었다. 교수님의 논문 중 토질 안정처리(Thermal Stabilization of Soils, 후에 내 박사학위 논문 제목)와 관련, 간단한 실험을 하였고 새로운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교수님께서는 매우 흥분하신 듯 샘플을 만지작거리시며 실험 사실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일, 그러나 한인교회의 여전한 반목
그날 그렇게 희망찬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내에게 전해주었다.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하나님 일을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냥 계시지 않는다며…. 첫째는 하나님 일이고, 그다음이 인간의 일인 만큼 지금 관여하고 있는 교회 일에 충성하라고 덧붙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니, 그 누구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인정하는 데 있어 저항심이 생길 수도 있다. 잉글스 교수님과 대화가 된 것도 일종의 운세이지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을 하러 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인 장로교회는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고, H 목사와 그 추종세력들로 인해 그 이전에 호주 장로교단에서 연합교회로 갈라지던 상황과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반대편에 속한 교인들끼리 서로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돌아서는 태도를 보며 나는 신앙, 교회, 질서…. 따위에 대해 회의가 생겼다. 교회 내에서는 무질서가 질서로 여겨질 정도였으며, 교회가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되는 듯하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가 싫어하는 교인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인 장로교회 H 목사의 태도가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호주 장로교단에서 한국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겠다는 H 목사의 일거수일투족 때문에 또다시 분열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사실, H 목사의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가 부흥되고 재정 상태도 좋아지는 것이 물론 H 목사의 업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빌미로 교회 운영을 독자적(한국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독립교회이지 굳이 호주 장로교단에 소속될 필요도 없다. 그런 방식으로 목회를 하겠다는 것은 사례금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재정을 본인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H 목사를 호주 장로교단에서 초청하여 교단에 소속되어 있고, 교회 자체도 교단 소속이라면 당연히 교단의 규정에 따라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한국식 독립교회를 주장하며 교인들에게 통성기도를 하게 하고 울부짖는 그들을 향한 호주 교단 목회자들의 한인 장로교회를 위한 기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답답하실 것만 같았다. H 목사의 기도가 정당하다면, 호주 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 이어지며, 원칙과 반칙이 엉켜있는 교회의 생리에 나는 점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신앙심이 바닥에 떨어진 나를 발견했다. 그럴수록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부모님과 아내의 간절한 충고도 있었지만, 분노와 원망이 솟구쳐 더는 교회 일에 관여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현진이와 명진이도 탈 없이 잘자라
쿠퍼 사장은, 아버지가 그의 회사에서 특수도자기 제작을 제법 잘하고 계시다는 말을 가끔씩 했다. 어머니는 텃밭 가꾸는 일로 온종일 보내셨다. 현진이와 명진이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한인 장로교회 문제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점점 더 문제가 커져갔다. 끄려 할수록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내 생각도 그대로였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교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근거 없는 모략성 발언도 들려왔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죄송했다. 먼 이국땅에서 교회의 분란 때문에 처신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고독을 스스로 이겨내셔야만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무렵에 ‘한인노인회’라는 단체가 생겼다. 이른바 한인촌 지역(Campsie) 공원에 한인들이 한두 명씩 모여 만든 단체였다. 부모님께서는 토요일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그곳에서 정을 붙이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어 자식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마음이 놓였다.
잉글스 교수님을 뵙고 얼마 후에, 교수님께서 다시 나를 만나자고 하셨다. 이번에는 교수님 연구실이 아닌 자택이었다. 교수님과 사모님은 기숙사에서 기거하고 계셨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수님 기숙사를 방문했다.
교수님은 이미 자녀들을 분가시켰으며 손자와 손녀들도 여러 명 있었다. 교수님의 고향은 태즈메이니아(Tasmania)라는 섬인데, 그곳에서 학위들을 마치고 국립과학기술원(CSIRO)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하셨다. 집을 별도로 장만하시지 않고 대학교 기숙사에 기거하시는 이유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시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이윽고 교수님께서 내 과거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하셨다. 어찌 보면, 부드러운 방법으로 면접을 하고 계신 셈이었다. 나는 교수님께 내 과거 행적을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말씀드렸다. 할 수만 있다면, 교수님 밑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더 하는 것이 내 목표라는 것도….
교수님께서는 선뜻 대답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교수님 댁으로 부를 만큼 신경을 쓰신 것은 분명히 내가 제시한 실험결과에 관해 관심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불합격된다면 그 원인은 아마도, 석사과정 지도교수인 매커크니 교수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과 내 영어수준이 잉글스 교수님께서 기대하시는 고급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다.
박사학위를 할수 있다는 기대감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그 실험결과에 대단히 만족해하시며 박사학위를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비추셨다. 그런데 문제는, 박사학위를 하려면 지금의 연구소를 사퇴해야 한다는 게 불안하신 거였다. 내가 박사학위 공부를 하기 위해 풀타임(Full-Time) 학생으로, 장학금을 호주 연방정부 또는 대학교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추천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순간, 어쩌면 그토록 덤비고 싶던 박사과정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것만 같았다. 나 같은 사람한테도 그런 장학금 혜택이 올까? 한국에서 항상 귀가 따갑도록 듣던 ‘Admission’(인증)과 ‘Scholarship’(장학금)이라는 단어가 현실감 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교수님께서는, 대학교 장학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받으면 학위를 끝내고 취업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대학교 장학금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고, 권위 있는 교수님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게 되면 박사학위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직장을 구할 때도 경쟁력이 있고, 직장에서도 대학교 장학금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율했다. 교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소중한 기회로 다가왔다. 장학금 액수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교수님께 드릴 수 있었던 말씀은, ‘만약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면 최선을 다해 교수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