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큰 희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사 공부를 시작할 경우를 대비해서 단계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ACI 연구소에서 연구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는 일이었다.
둘째, 대학 장학금을 받게 될 경우, 그 장학금과 아버지께서 주시는 생활비 일부를 합해서 집안 재정을 뒷받침할 장기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과 두 아이, 여섯 식구가 살기에는 그래도 부족하지만, 뒤 텃밭에서 반찬거리와 달걀이 조달되므로 일 년 동안 먹을 쌀만 미리 쌓아두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째, 대학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될 경우, 아내도 직장에 다시 다니고 나도 파트타임을 계속하면 또 그런대로 몇 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쌀을 많이 사서 쌓아두면 위의 3가지 계획 중 어느 쪽으로든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매주 25kg짜리 쌀자루를 사 들고 집에 들어왔다.
쌀 저장의 해프닝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쌀을 저장해둔 마루에 아주 작은 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 묵은 쌀에서는 쌀벌레들이 생겨서 쌀이 썩어가고 있었다. 저장고 없이 쌀을 쌓아둘 수 없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쌀 저장 아이디어는 그렇게 막을 내려야만 했다.
일요일마다 교회 분위기가 시끄러웠지만, 나도 이전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요일에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교인들끼리 서로 바라보는 눈길이 날카로웠고, 내 마음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용납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찬송, 기도, 설교, 성가, 주일학교 등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분명 기만이었다.
하나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교회를 내 몸같이 아끼라고 말은 하면서, 중심에서 교인들의 갈등을 부추기는 H 목사의 이중적인 태도는 참으로 이상하기만 했다. 정해진 규정대로 하면 별로 어려울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 교회를 난도질하는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교회 예배가 끝나면 H 목사 일행과 반대쪽 교인들 사이에 험악한 말들이 오갔다.
어느 일요일은 교회 바로 옆에 있는 목사 사택에서 양쪽 교인들 사이에 고성과 몸싸움도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목사 사택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순전히 H 목사의 개인적인 욕심이 부른 결과였다. 교회를 독립적으로, 한국식으로 운영하여 재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보겠다는 사욕에서 비롯된 사건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일요일, 예배드리러 교회에 갔더니 H 목사와 그 일행들이 아무 말도 없이 교회를 떠나고 없었다. H 목사 사택의 모든 살림살이가 없어졌고 텅 비어 있었다. 예배당 강대상도 빈 채로 예배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H 목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그리고 서서히 계획된 일이었던 것이다. 예배드리려던 교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H 목사와 텅 빈 강대상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목사로서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
H 목사가 없어진 일요일 예배를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둑처럼 그렇게 사라진 것을 보니, 참으로 원망스럽고 분노가 치밀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법을 지키는 목회자라면 떳떳하게 교회에 통보하여 일요일 예배에 차질이 없게 해야 하지 않은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종적을 감춘 후에 어떻게 또 다른 강대상에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해도 하나님께서 H 목사 일행을 축복하시고 그들의 통성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건가? 목사의 탈을 쓰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속된 표현으로, “엿 먹어라, 이 ××들아!” 하고 반대편 교인들에게 골탕을 먹여버린 것이다.
교회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나로서는 다른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다지 않는가? 호주 장로교단에서 H 목사의 영주권을 박탈해서라도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났다.
H 목사 추종 교인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새로 이민 간 사람들, 회사 주재원들, 한-호간 무역인들, 영주권 없이 체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선두에 서서 교회 분열에 가담한 인물은, 이른바 한국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한-호간 무역을 하고 있다는 사람이었다.
교회 분열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앙심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과거에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았던 사람들이 호주의 백인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자, 한인 교회를 통해 욕구 불만을 표출하는 그들만의 정체성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한인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 모인 교인들의 교회가 아니었음을 나는 시간이 갈수록 깨닫게 되었다.
H 목사 자신도 호주 장로교단 목회자들과의 언어소통 문제, 생활습관, 교회운영 등을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한국 고신파 장로교회에서는 스스로 사퇴하며, 백인사회에서의 열등감 같은 것 때문에 독립적인 한인교회를 세우려는 속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호주 장로교단은 H 목사의 목회활동을 보장해 주었고,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해주었다. 그런데도 쓸데없는 짓을 일삼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교인이라 할 수도 없으며, 교회를 그들의 자존심 내세우는 장소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 당시 한인 연합교회에 합류했던 변조은 목사 외 Y 교수 일행도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월남에서 온 K 목사 추종 교인들과 Y 교수 쪽 교인들 간의 분열이었다. 이제 한인 사회에는 한 개의 장로교회와 독립교회, 두 개의 연합교회가 생겼다. ‘교회’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불미스런 사건들에 대해 나는 점점 회의에 빠졌다. 소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교회 간판을 내걸고 있었고, ‘목사’라는 직분으로 사역하는 이들이 주도자였다.
한인 장로교회의 길을 찾기 위한 모색
이번에는 한인 연합교회의 K 목사를 돕는 Y 목사가 새로 교회를 설립했다는 또 다른 소식도 들려왔다. 이제 한인 사회에는 5개의 한인 교회가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교회 간판을 내걸었다. 그것은 분명 독버섯이었다. 목자를 잃은 양 떼들이 우왕좌왕 갈 길 찾아 헤매는 한인 장로교회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우선 처리 사항이었다.
숲 속에서 갑자기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는 나침판이 필요하다. 먼저, 호주 장로교단 책임 목사와 과거에 임시 담임목사로 교회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던 클레멘츠 목사에게 현안을 논의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교단 관계자와 노회 소속 목사들이, 순전히 한인 장로교회 문제만을 위해 임시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H 목사가 분리운동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어 했다. 혹시 호주 장로교단에서 잘못한 게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교회 자체에서 목사의 사례금을 정하는데, 호주에서는 교단 총회에서 고시하는 대로 각 교회가 집행하는 데 대한 재정적인 불만이 원인이었음을 얘기했다.
기타 사안들(사택, 자녀교육비, 운영비, 자동차 운행….)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따라서 한국식 독립교회를 선언하며 야반도주 형식을 취한 H 목사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내 건의는 회의 안건으로 올려졌다. 한인 장로교회가 수습될 때까지 호주 장로교단에서 다시 임시 담임목사 한 분을 파견해달라고 했더니 그 건은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당시 한인 장로교회의 위치로 봐서는 시드니 서부 노회에서 파견되어야 했지만, 한인 장로교회 문제를 처음부터 경험하신 클레멘츠 목사를 다시 임명해 달라고 했다.
교단의 결정이 내려졌다. 임시 담임목사는 클레멘츠 목사로 하되, 지역노회 소속 목사 한 분을 더 임명하였다(다른 한 분은 Burwood 장로교회 담임목사로 기억됨). 그리고 H 목사는 호주 장로교단 소속에서 제명된 것이다. 비록 제명은 되었다 하더라도, 영주권 박탈 여부는 전적으로 연방정부 이민성의 소관이기 때문에 호주의 영주 이민 비자를 받은 이상 그것은 호주 장로교단에서 처리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 많은 교인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리고, 밤중에 몰래 사택을 빠져나간 H 목사의 무책임한 행동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일 중의 하나이다.
나는 또다시 교회 일에 엮일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에 임시 담임목사의 설교문을 받아 토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번역하여 일요일 예배 때 호주 목사 옆에서 통역해야 하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