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잉글스 교수님께서 연락하셨다. 내가 대학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본부에서 수상(Award) 확인 편지가 올 테니, 그것을 받는 즉시 박사학위 입학 행정절차를 밟아도 좋다고 하셨다.
이게 웬일인가?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이제 현실이 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적도 일어날 수 있는 걸까? 도저히 박사학위 공부를 할 만한 실력도,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 내가 ‘덤벼’로 또 기회를 잡다니……! 그것도 박사학위라는 높은 벽을 향해 덤벼보게 되다니!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설렜다. 교회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 어쨌든 갑자기 죄송스럽기도 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불가능’으로 생각했던 박사학위 공부가 ‘가능’ 으로 바뀐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먼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멀리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그 큰 사건을 해석했다.
NSW 대학교에서의 박사과정은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코스워크(Course Works)이다. 그 과정을 선호하는 학생들은 학부의 우등생(Honors)으로, 석사과정 없이 바로 박사과정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둘째는 학부와 석사학위를 이수한 자로서, 코스워크를 하지 않고 연구논문으로 졸업하는 과정이었다. 석사과정 동안의 코스워크를 인정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의 논문은 연구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주제 선택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바로 후자를 택했다. 그 이유는 첫째, 논문의 주제가 이미 결정된 상태였고, 결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결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실험적 증명을 하면 되는 셈이었다.
박사과정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도전
둘째, 학사학위 과정만큼 또 암기해야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박사학위 과정은 실로 내 덤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다. 내 주변의 교민들 중에는, 내가 ACI 연구소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데, 검은 머리 한국인이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더 좋은 수가 있겠느냐는 염려도 했다. 사실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그에 버금가는 직장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한 번 이민자는 영원한 이민자라는 말이 있듯, 한국인이 제아무리 날뛰어봤자 별 볼 일 없는 코리언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목표는 달랐다. 서울을 떠나갈 때 했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 변함이 없었다. 사실 이민자들이 그 나라의 박사학위를 소지하고도 택시 운전하는 사람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S그룹에서 파견되어 그곳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귀국했는데도, 자녀들이 한국 학교에 적응을 못 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는 결국 24시간 편의점을 운영하며 생활했다. 내게는 그런 두려움은 없었다. 아직 공학박사가 된 것도 아닌데 그런 걱정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박사학위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이민 간 보람이 충분했다. 1978년 3월에 박사학위와 관련된 등록 절차를 모두 마쳤다.
나는 퀵 박사에게 그동안의 모든 과정을 설명했다. 그분과 시작했던 압축도자기 프로젝트(Pressing Ceramic Project)도 종결되었고,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단계여서 흔쾌히 내 성공을 기대하셨다. 나는 ACI 연구소를 사퇴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K.C 회사에서 일하시며 당신 수입의 일부를 생활비로 보태주셨다. 대학교 장학금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쌓아둔 쌀자루가 적어도 1년 이상은 먹어도 될 정도였고, 텃밭 채소류까지 여섯 식구가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현진이는 벌써 초등학교 1학년이고, 명진이는 태어난 지 10여 개월 되던 때였다. 아내는 명진이를 출산하고 몸조리를 했지만, 외국에서의 산후조리가 한국 같지 않아서인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기 때문에 아내는 다시 취직을 서두르고 있었다.
한인교회의 난립
송두리째 흔들렸던 한인 장로교회가 몇 개월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부모 없는 고아들이 서로 의지하듯 교인들끼리 더 가까워졌다. H 목사는 한인 장로교회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한국식 독립교회를 창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H 목사 추종 상당수의 교인이 우리 교회에서 빠져나갔다.
그 무렵 시드니 여기저기서 한인교회 창립소식이 들리더니 갑자기 10개 이상의 교회가 생겼다.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는데, 심지어 일반 가정에서도 한인교회를 세웠다고 했다. 그 과정에는 목회자들의 역할이 큰데, 그것을 전도를 위한 사명감으로 봐야 할지, 먹고 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봐야 할지, 내 머리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뜻으로만 돌리면 최상의 해석이 되는 걸까? 왜 한인교회가 하나로 뭉쳐서 성장할 수 없는 건지, 모든 일이 의심스럽고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호주 주재 한국 상사 대표들도 한인 장로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외환은행 시드니 사무소장님 가족도 있었다.
아내는 호주 컴퓨터회사에 다니면서 주로 펀치 카드(Punch Card) 전문 일을 하다가 한국외환은행 시드니 사무소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한국외환은행 시드니사무소 소장님 내외분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슬하의 자녀는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이었다. 막내는 현진이보다 두 살 위였지만 형처럼 따라다녔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까이 지내고 있다. 아내는 외환은행 사무소 소장이 바뀐 후에도 상당기간 그곳에서 은행 일을 했다. 아내가 다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의 경제 상태가 전보다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아내한테서 웃음 섞인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나…, 시드니 필하모닉 합창단 오디션 시험에서 합격 통지받았어요!”
이게 무슨 잠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뭐? 시드니 필하모닉 합창 단원?”
아내는 선천적으로 소프라노 음성을 타고 나서, 항상 성악을 전공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설마 시드니 필하모닉 합창단원이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동양인은 일본인과 아내랑 2명이어서 더 자부심을 갖는 것 같았다. 그 바쁜 일과 속에서도 밤늦게까지 연습하며, 정기적으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무대에서 공연한 덕에 나도 3여 년 동안 당당하게 청중에 한 사람으로 음악(Concert)을 즐기는 생활을 한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