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W대학 박사과정 학생신분증 교부
나는 공식적으로 호주 NSW 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부 토목재료공학과(Civil Engineering Materials) 박사과정 학생신분증을 받았다. 그 증명서가 있어야 도서관은 물론 실험실 기구, 그리고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잉글스 지도교수님과의 대화가 별로 많지는 않았다. 어떤 학생이든, 교수님과의 면담시간은 오후 2 ~4시에 이루어졌는데, 그것도 사전에 미리 약속을 해야 가능했다.
교수님은 주로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국제회의 참석과 토목공사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재판에서 전문가로 증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바쁜 일정에 면담 시간을 요청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연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또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지 정도는 반드시 교수님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이 내 고민거리였다.
교수님의 연구실은 박사과정생들 연구실의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실제 거리는 몇 십 리 정도나 되는 듯했다.
사실 나의 박사학위 토픽(주제)은 웬만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험이었다. 말하자면, 도로건설에서 표면층의 흙을 적절히 열처리한 다음, 그 흙에다 어떤 화학약품을 결합하여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변화시키면 끝나는 연구였다. 토목재료공학도 아니고 요업(Ceramic)공학도 아닌 어중간한 재료 개발이었다. 도로 표면층의 흙을 사용하여 도자기 같은 재질로 바꿔버린다는 주제로서, 즉 말도 안 되는 연구였다. 그러므로 도자기공학을 잘 모르시는 지도교수님께서 나를 만나 특별히 지도할 것이 없었고, 나 또한 토양공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문헌 자료와 실험적인 증명 없이는 교수님을 만나도 별로 할 얘기가 없었다.
나의 박사학위 연구주제
며칠 동안 시간 조절 끝에 교수님을 뵐 수가 있었다. 내 연구계획을 설명하자 교수님께서 대부분 동의해 주셨다. 그리고는 조건을 내세우셨다. 이른바, 요약보고서(Watching Brief)를 1~2페이지 정도 작성하여 약 2주마다 한 번씩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쉬운 듯한 요구사항이지만, 요약보고서란 잘못 표현하면 요약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까닭에 요약보고서 작성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과제이다.
2주마다 제출하는 요약보고서를 교수님께서 다시 정리하여 대학교에 보고하고 계셨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런대로 요약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왜냐하면, 박사과정답게 수준 높은 영어실력이 요구되었고, 실험기구들이, 토질공학이 아닌 도자기-토질공학 실험기구를 고안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실험실 총감독자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질질 끄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런 이유들을 일일이 교수님께 일러바칠 수도 없고 교수님께 말씀드린다 해도 교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러 훈계하고 명령하는 체계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한국식 방법이 약이었다. 통사정도 하고, 마침 인삼가루가 서울에서 왔기에 ‘인삼가루를 먹으면 건강에 아주 좋다’고 설명하며 주기도 했다. 가끔 선물하는 인삼가루가 우리 사이를 차츰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새로 고안한 실험기구가 제작 완료되었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기구였다.
제작한 실험기구는, 토양을 일정한 온도에서 구워내는 회전식 소성로(Rotary Kiln)였다. 벤치형 포터블 로터리 소성로로 토양 샘플을 그 소성로에 통과시키면 통과하는 시간과 온도가 조절된다. 온도와 시간이 조절된 토양시료에다 강산(Strong Acid)이나 강알칼리(Strong Alkali) 약품을 결합해 어떻게 굳어지는지를 광물학적으로 이해하고 굳어지는 강도를 통계적으로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실험량이 대단히 많았다. 각각 다른 토양들을 시료로 택해야 했고, 그 시료들을 각각 다른 온도와 시간에 맞게 구워내야만 했다. 구운 시료들에 화학약품을 첨가하여 결합하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뿐인가? 굳어지는 이유를 밝히려면 광물적 분석과 물리적 시험까지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작업량이 보통 아니었다. 전체 작업량 중 토목공학과에서는 일부만 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분석 작업은 광물 및 금속분석실에서 이루어졌다.
호주에서 도로를 건설할 때 가장 문제가 된다는 4가지 흙(Red Earth, Black Earth, Sandy Soil, Expansive Soil)을 선택했다. 이런 흙들은 도로건설 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런 흙들이 있으면 어려운 공사에 해당한다. 즉, 호주 해변의 흙과 내륙지방의 흙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해변의 흙들 중에는 비가 오거나 습기가 많을 때 물을 흡수하여 자기 몸보다 몇 배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들도 있다.
만약 이런 흙들이 있는 지역에다 도로를 건설하면 길이 부풀어 올라 도로에 금(Crack)이 가게 된다.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 공사 전에 시멘트, 석회 또는 화학약품으로 부풀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다. 유기성 토양(Black Earth Soil), 팽창성 토양( Expansive Soil)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또한,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사막의 모래 같은 먼지형의 흙이 대부분이다. 시멘트나 석회 등을 사전에 혼합하여 안정처리 하지만, 경제성도 없고 물을 쉽게 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런 특성 때문에 호주 내륙의 도로는 먼지가 나더라도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물을 만났을 때 부풀거나 건조 시 수축하거나 바람에 먼지가 일거나 수분 때문에 끈적끈적하여 잘 풀리지 않는 성질들은 점토공학에 해당하는 것이다.
점토(Clay)는 Si-Al-6(OH) 구조로 되어있어서 어떤 흙이든 흙 속에 존재하는 점토의 기본구조는 변할 수 없지만, 6(OH) 이라는 물 분자가 어떻게 자리를 잡고 어떤 외부원소와 남게 하느냐에 따라 물리적인 성질을 바꿀 수는 있다. 즉 끈적거리는 것, 수축하는 것, 팽창하는 것, 먼지를 일으키는 것은, 토양 속에 존재하는 점토량과 다양한 형태, 점토 자체의 특수한 특성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번 연구 과제는 흙 속에서 점토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6(OH)이라는 물 분자를 온도처리 하여 증발시키는 일과, 증발되어 물 분자를 잃어버린 토양에다 화학약품을 결합해서 더 이상 불안하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점토 속의 6(OH)을 높은 온도에서 모두 증발시켜버리면, 더 이상 점토가 아닌 모래가 되어버린다. 6(OH)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점토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화학약품과의 반응이 약화되거나 반응 속도가 늦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온도와 시간을 조절하여 6(OH) -> 5(OH) -> 4(OH) -> 3(OH) -> 2(OH) -> 1(OH) -> 0으로 변화시키면서 모래 같은 점토가 아닌, 보통 점토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6(OH)과 0(OH), 두 개의 조건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5(OH)-1(OH) 범위 내에서 가장 우수한 X(OH)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떤 온도와 시간이 가장 적절한 X값인가를 알아내게 되면 내 논문의 핵심 요소가 밝혀지는 셈이었다. X값은 화학약품(산이나 알칼리)을 혼합시켰을 때 가장 많이 굳는 정도(강도)를 지표로 하여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공정이 성공한다면 도로건설 현장의 흙을 즉석에서 콘크리트화 하는 게 가능할 것이며, 안정처리를 위해 특별히 석회(Lime), 시멘트 또는 기타 재료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이상적인 흙 안정처리 공정이 새롭게 탄생할 수도 있는 연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