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실험실에서 살다시피하며 연구
나는 X점을 찾기 위해 약 1년가량 실험을 계속했다. 일요일에 교회 예배드리는 일과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한인 장로교회를 정상화하는 데 쓰는 시간 외에는 대학원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한 노력의 결과였을까?
호주 도로건설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대표적인 흙들에서 X점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했다. 최종적인 X점은 전체 실험결과를 통계적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나는 통계처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통계처리를 하려면 최소한 몇 학기 동안 통계에 관한 수강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실 몇 학기 수강해도 소용없다고 느낀 이유는, 통계에 관한 강의와 실습으로도 소화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논문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도 다른 길을 모색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대학교 수학과 통계학 전공 박사과정 학생을 어렵사리 만나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모든 실험결과 자료를 챙겨서 박사과정 학생에게 설명했다. 실험과 통계처리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에게 설명했다. 그 학생의 답변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그 정도는 쉬운 통계처리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나 혼자 해결하려면 몇 년 걸릴 수도 있는 일인 듯했는데 별거 아니라고 하니 실로 천만다행이었다. 그 학생이 몇 가지 통계처리 방법을 시도하여 가장 좋은 수식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 학생한테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그가 찾아준 통계수식은 다중회기(Multi-Regression) 방식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복잡한 통계수식은 아니었다. 다중회기 통계처리에서는 분명히 각 흙들에 대한 X점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식으로는, 통계처리 학생에게 큰 선물을 해야 했지만, 학교 지하 식당에서 샌드위치로 답례한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그렇게 가장 중요한 1단계 고비를 넘겼다. 통계처리에서 보여준 X점은, 어떤 흙이라도 물 분자 6(OH)을 전부 쫓아버리는 온도와 시간보다는, 흙의 특징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3OH)-1(OH)의 범위에 놓였을 때 가장 단단하게 굳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점토 내의 물 분자를 전부 날려 보내는 것보다는 약간의 물 분자가 남아있을 때 가장 잘 굳는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그런 상태를 나는 ‘반응성 점토구조’라고 표현했다. 즉, 반응성 점토구조일 때 화학물질이나 다른 안정제를 최대한 흡수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의 새로운 발견
불로 인해 없어졌던 물 분자가 화학물질을 결합했을 때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단단해지는 현상은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토양을 가열하여 반(Half) 상태로 처리되면 팽창과 수축하는 성질이 없어지고, 여기에 강산이나 강알칼리 성분을 결합하면 토양이 굳어가는 과정을 확인했다. 따라서 도로건설에서의 부품과 주저앉음 현상은 흙 속에 존재하는 점토의 6(OH)을 조절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제1단계에서 찾아낸 온도는 약 400~600℃ 정도였고, 그 온도에서의 처리시간은 15~30분 정도로 밝혀졌다. 이제 제2단계에 착수해야 했다.
제1단계에서는, 각 흙의 X점 조건에서 어떤 화학약품을 결합해야 가장 단단하게 굳는지를 찾는 일과 동시에 화학약품을 어느 정도 혼합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화학약품에서 강산(Strong Acid)으로는 질산(HNO3), 염산(HCl), 황산(H2SO4)을 택했고, 강알칼리(Strong Alkali)로는 양잿물(NaOH), 물유리(Na2SO3), 황산나트륨(Na2(SO4)3)을 선택했다.
이들 중 가장 강하게 반응하여 최대로 굳게 하는 약품을 알아내면 제2단계의 목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일단 실험방향을 아는 이상 나는 쉬지 않고 결합시험을 해보았다. 약품 선택도 중요하지만, 첨가량을 정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수없이 반복 실험을 한 결과, 차츰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토양마다 다르기는 해도, 강산보다는 강알칼리가 더 효과적이었다. 알칼리 물질 중에서도 양잿물(NaOH)과 물유리(Na2SO3)가 아주 좋은 반응을 보였다. 제2단계 작업도 끝났다.
이제 제3단계에서는 위 두 개의 알칼리 물질이 왜 강하게 반응을 하며, 가장 잘 굳는 이유를 규명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이 작업은 토목공학과에서는 할 수 없고 광물분석실과 금속분석실에 있는 X-Ray, 전자현미경(SEM), 적외선 원소분석기(Infra-Red) 등을 통해 결합물질을 밝혀내면 사실상 실험은 모두 끝나는 셈이었다. 나는 수많은 샘플 작업을 마치고 분석작업에 몰두했다. 실험기구가 나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토목공학과와 금속공학과 교수님께 부탁하여 겨우겨우 실험하는 것도 여간 역겹지 않았다. 금속공학과 외의 학생들은 언제나 실험 순위에서 밀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더라도 마지막 작업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3단계까지 모든 작업을 마치고
1980년 중반에 드디어 3단계까지 모든 작업을 마쳤다. 이제 교수님과 의논하여 논문을 써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잉글스 교수님은, 백인 학생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내 노력을 눈여겨보고 계셨다. 중간마다 실험결과를 보고할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검토하셨다. 백인 학생들은 주말을 즐길 수 있었지만, 나한테는 주말이라는 단어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 무렵의 고생은 내가 무작정 호주에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고생이라 할 수도 없었다.
현진이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 명진이는 4살이 되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고향 생각에 젖어 계셨지만, 한국방문이 쉽게 이뤄질 수 없었다. 한인 장로교회는 호주 목사가 열심히 이끌어준 덕분에 웬만큼 정상 운영되는 듯했다. 또다시 한인 목사 청빙 문제가 대두되었다. 언제까지나 호주 임시 담임목사의 설교를 통역하며 유지할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한인교회라는 이름으로 두 번이나 쓴맛을 본 교회 운영진에서는 한인 목사 청빙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시작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영어도 좀 할 줄 알고, 설교도 잘하고, 한국말도 잘하는, 이른바 미국과 한국을 다 아우를 수 있는 목사를 초청하여 2세들 교육에도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호주 장로교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두 번씩이나 실패한 호주 장로교단의 판단이 문제였다.
그러나 어쨌든 한인 장로교회로서는 호주 장로교단과 다시 협의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씩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은 나로서는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인 목사 청빙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교인들의 뜻을 임시 담임목사와 협의한 끝에, 교인 총회에서 누구든 결정이 되면 그 결과를 노회에 상정하겠다고 했다.
3번째 한인 목사
3번째 한인 목사는 미국 LA지역 오렌지카운티에서 목회한다는 Y 목사를 추천받았다. 서울신학 출신이고, 미국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마친 분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Y 목사가 청빙 대상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Y 목사 외에도 여러 한인 목사들이 거론되었지만, 미국식-한국식 목사로는 가장 근접한 대상이었다. 우리는 Y 목사를 한인 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지명했다. 그리고 바로 호주 장로교단에 이민초청 서류를 제출했다.
얼마 후 호주 장로교단에서 우리 뜻을 받아들여 별 애로 없이 승인을 했다. 미국에서 Y 목사로부터 답변이 왔다. 사전에 사모님이 시드니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 교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우리 교회로서는 미리 대화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일치되었고, 가능한 Y 목사도 함께 방문하시라고 답을 보냈다. 그러나 사모님만 시드니에 도착했고, 주요 교인들 몇 사람과 함께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사모님은 Y 목사가 활동 중인 LA 오렌지카운티에 관해 얘기하셨는데, Y 목사 가족은, 목사 내외와 딸 한 명으로 식구가 간단했다. 한국인 목사 신분으로 미국에서 목회학 교육을 받았고, 미국의 한인 교민들을 상대로 목회활동을 하셨으니 우리가 원하는 목회자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우리는 호주 장로교단의 한인 장로교회 담임으로 Y 목사를 정식으로 초청했다.
우리 교회는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며 거듭 성장하였고, 호주 장로교단에서도 다시 신뢰하며 지원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