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와중에도 제3단계 분석 작업이 끝났다. 실험계획부터 3단계 결과까지 모두 내 손에 들어왔다. 잉글스 교수님께서는 새로 밝혀낸 결과를 국제세미나, 국내세미나, 여러 개의 기술잡지에 투고하시며 내가 논문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계셨다. 투고할 논문 작성은 1차로 나한테 지시하시고, 내가 제출한 것을 거듭 수정하셔서 완성본을 투고하는 형식이었다.
아무래도 1차로 작성한 내 논문이 교수님이 하신 것만큼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작성한 논문을 검토하시면서 가끔 교수님의 어두운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께서는 내 영어실력이 국제세미나 발표 수준이길 원하시지만, 그 정도에 이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교수님은 내용을 수정하면서까지 몇 개의 완성본을 잡지에 싣거나 국제세미나에 발표도 하셨다. 물론, 내 이름이 공동저자로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원고 수정을 많이 하시면서도 내 연구에 흥미를 느끼신 이유는, 도로 표면 토양을 즉석에서 콘크리트화 하는 홍토화(洪土化, Laterization) 프로세스에 대해 듣는 사람마다 관심을 가졌으며 질문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김준형 회장님의 도움 요청
1980년 후반쯤의 어느 날, 행남사 김준형 회장님한테 편지가 왔다. 편지내용이 좀 다급했다. 가능한, 뉴질랜드의 카오린(N.Z Koalin) 회사와 접촉하여 일본 무역회사를 거치지 않고 카오린 원료를 직접 수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다. 나와 K.C 회사 사장(John Cooper)이 지난번에 행남사를 같이 다녀온 후 우리는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행남사 제품 수입 사업이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의 수입규모가 너무 작아서 대량으로 수출하는 행남사와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 주원인이었다.
K.C 회사와 행남사 사이의 수출·입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K.C 회사를 통한 뉴질랜드 카오린 수출·입 사업 또한 중단된 상태였다. 두 회사 간의 사업이 진척되지 않으니 K.C 회사를 통해 뉴질랜드 회사에 접촉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 김준형 회장님의 편지내용은 자못 심각했다. “일본 무역회사의 횡포에서 벗어나야만 행남사 제품 생산에 차질이 없겠고, 이번 기회에 일본 무역회사를 건너뛰지 않으면 앞으로 원료조달 때문에 회사운영이 심각해진다.”라고 몇 번이나 반복하셨다.
나는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뉴질랜드 회사와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접촉부터 해야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 회사 사장(기억 안 남)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한국의 행남사를 소개하고, 나는 행남사 기술자문으로서 카오린 공급 문제로 뉴질랜드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뉴질랜드 회사로부터 회신이 왔다. 언제든지 자기네 회사를 방문해도 좋다고 하여 나는 방문 일정을 잡았다.
뉴질랜드 카오린사 사장과의 비지니스
물론 그 모든 진행상황을 전화나 편지로 행남사에 보고했다. 행남사에서는 나의 뉴질랜드 방문 일정에 맞춰 필요한 여비와 경비를 보내왔다. 나로서는, 첫 뉴질랜드 방문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알려진 카오린(Koalin) 광산도 직접 견학할 수 있는 기회였다. 뉴질랜드 카오린 회사의 본사는 오클랜드에 있었고, 실제 광산의 위치는 오클랜드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아주 시골이었다.
먼저 행남사 기술고문인 김 회장님의 편지를 내밀었다. 행남사의 규모, 역사, 기술 수준, 미국을 비롯한 유럽으로의 수출규모를 알려주었더니, 그들은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깜짝 놀랐다. 행남사 종업원이 천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들은 그만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행남사의 규모로 볼 때, 카오린 원료 소모량이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하는 듯했다.
나는 뉴질랜드 카오린 원료를 가지고 일본의 무역회사가 중간 역할을 하며 폭리를 취하는 것도 문제지만, 공급량을 임의로 조절하기 때문에 행남사가 제품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행남사에서는 뉴질랜드 카오린 회사로부터 직접 원료를 수입하고 싶어 하니,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뉴질랜드 회사 사장은 조금 난색을 표하더니, 행남사로 직접 수출하려면 일본 무역회사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된다고 했다. 사태가 그렇게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무역회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원료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며 계약서류를 나한테 보여주시던 김 회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행남사와 일본 무역회사와의 계약 내용을 알고 싶다는 것이 뉴질랜드 회사 사장의 마지막 반응이었다.
직접 접촉하는 것을 일본 무역회사가 알게 되면 문제가 커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뉴질랜드 회사 사장에게 앞으로의 모든 진행과정에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약속받는 데는 성공했다.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외부에 노출하지 않겠다는 간단한 메모를 받아낸 것이다. 뉴질랜드 사장한테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나는 시드니로 돌아왔다.
곧 모든 사실을 행남사에 보고하며,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뉴질랜드 회사 사장 일행을 초청하여 행남사의 규모와 수출, 기타 사정을 얘기하고 한국식으로 극진히 대접하라고 요청했다.
뉴질랜드 카오린사 사장과 한국 방문
행남사에서는 즉시 뉴질랜드 회사 사장에게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나도 한국에 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지막 단계에 놓인 논문작성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였기에 생각 끝에 뉴질랜드 회사와 시간을 조절하여 다시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만난 사람은 뉴질랜드 회사 사장이 아니고, 뉴질랜드 마오리족인, 오클랜드대학교 화공과 출신의 영업 담당 이사쯤 되는 직원이었다. 내가 두 번째 행남사를 방문했을 때는 김 회장님의 아들인 김 전무님이 사장으로, 박 부장님은 박 이사(연구개발)로 승진하신 상태였다.
뉴질랜드 카오린 원료 문제는 박 이사님 소관이었다. 김 사장님은 미국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뉴질랜드 회사 임원과 대화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으나 기술적인 대화는 어려워하셨다. 그리고 기술담당 박 이사님은 기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영어 소통이 어려웠다. 그런 자리에서 양쪽을 소통시킬 수 있는 내 위치가 행남사로서는 필요한 입장이었다.
행남사의 임원들은 뉴질랜드 회사 임원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뉴질랜드 회사 직원은 행남사 규모를 보고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회사로서도 그렇게 큰 규모의 회사에 납품한다면, 굳이 일본 무역회사를 거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영업을 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별도로 영업하지 않아도 되는, 꿩 먹고 알 먹기의 개가를 올리는 셈이었다.
일본 무역회사 문제는 뉴질랜드 회사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 임원은 본국에 돌아가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며, 모든 일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는 상업적인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한 후에 한국을 떠났다. 나는 행남사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머리를 정리하고 고향 주변도 둘러보기로 했다. 또한, 행남사에 들른 김에 회사 임원들과 전체 기술사원들을 모아놓고 점토를 주제로 성의껏 강의도 했다.
직원들과 임원들은 점토가 그냥 흙덩어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도 다양하고 복잡한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무척 놀라워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 않은가! 모를 때는 간단해 보여도 알고 보면 몰랐던 것이 너무 많고 겁도 나는 법이다. 무식할수록 단순하고 용감하다는 말을 점토공부를 하면서 깨달았고, 표현이 어려울 만큼 점토가 복잡한 자연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토는 우선 결합력을 가진 흙이다. 결합력이 없으면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 결합력은 입자의 크기와 물 분자와의 상호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뉴질랜드 카오린을 백토(白土)라고 부른다. 결합력도 있고 소성(Firing)하면 흰색에 가까워서 세계적인 점토류에 속한다. 자연에서 생산되는 점토류인 카오린의 점력이 높고, 구웠을 때 흰색에 가까운 것은 대단히 희귀한 경우이다. 이는 작은 입자의 크기와 철분(Fe) 함량이 낮아야만 가능한데, 우리나라에서는 하동지역에 있는 백토가 그런 성질에 가깝지만, 지금은 고갈되어버린 상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