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행운이 왔다. 막상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더라도 직장을 구할 일을 고민하던 차에 대학에서 직장을 구하게 된 것이다. 토목공학과 실험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학부 학생들에게는 실험준비와 설명을 하고, 대학원생들에게는 그들의 연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실험장비나 실험자료를 제공하는 전문직이며 평생직장이었다.
연봉이 정해져 있었고 연구실도 별도로 있어서 말 그대로 대학교 직원 중의 일원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좀 더 노력하여 학생들로부터 큰 불만이 없으면, 마지막 관문인 교수직도 넘겨볼 수 있는 자리였다. 또 그렇게 지내던 사람들이 교수로 부임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만약 시드니 이외의 지역에 취업이 될 경우 이사 문제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런 면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러모로 그 직장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여러 모로 잇점
뿐만 아니라, 논문을 제출한 상태에서 심사위원들의 지적 사항이나 반박 질문에 대해 교수님과 신속하게 협의할 수 있었으니 그 점도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대학교 학위위원회에 논문을 제출하면, 행정 절차상 다섯 분의 전문가에게 심사를 의뢰하게 된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네 분의 심사위원은 다른 나라에 계시기 때문에 심사평을 적어도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네 분의 심사 결과가 대학교 학위 위원회에 도착하면, 내 지도 교수님의 심사평과 함께 다시 대학교 학위 청구위원회에 제출하는 절차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사위원 전원이 논문에 이상 없다고 결정했을 때 얘기지,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라도 문제를 제기하여 일일이 답변해야 할 경우에는 심사기간이 더 늦어지는 학위 통과 시스템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학 내의 내 일자리를 강력히 학교에 추천하신 분은 바로 잉글스 교수님이었다. 그런 점을 보더라도 학교에 남게 된 것은 보통 일로 넘길 성질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식으로 월급이 나왔다. 아내도 일정한 수입이 있었으므로 우리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때때로 식구들과 시골로 여행한 것도 그때였다. 호주는 사회보장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나라다. 실업자들에게는 새로 취업할 때까지 실업수당이라는 것을 지급한다. 그런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그래서 실업자가 되어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는다.
노인들에게는 연금혜택이 있었다. 퇴직 후, 한국에서처럼 자식들에게 구걸하는 식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사회안전망이었다. 연금에 이어 국가에서 집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도 호주 시민권자로서 그런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셨고, 국가로부터 연금과 주택을 받았다. 아버지는 K.C 회사에서 종일 일하시지 않아도 국가에서 받은 주택과 최소한의 생활비로 노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Y 목사의 일탈적 행동은 더욱 심화되고
한인 장로교회의 골치 아픈 상황만 여전했다. Y 목사 일행이 계속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나는 많은 것을 통감했다. 교회문제는 항상 목회자가 그 중심에 서 있었고,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 괴이한 설교를 늘어놓으며 불을 지르는 양상이었다. 사람만 다를 뿐, H 목사와 Y 목사의 교회독립 사건은 공통점이 많았다. Y 목사 추종 세력이 점점 확대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나는 풀타임(Full-Time) 목회자가 아니었다. Y 목사는 교회에서 받은 여러 가지 재정과 시간을 이용해 심방이라는 명목으로 반대편 교인들을 찾아가 당위성을 설명하고 다녔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이번 기회에 나도 Y 목사 편으로 돌아서 호주 장로교단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하자는 권유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똑똑하고 영리하지만, 기회주의자들이 너무 많았다. 분위기가 한 번 바뀌기 시작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변해버리는 교인들이 참으로 많았다.
직장에 매인 나로서는, 심방이라며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Y 목사 일행의 행동을 막을 길이 없었다. 심지어는 임시담임인 호주 목사까지도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Y 목사를 호주 장로교단에 남게 하려면 나를 포함한 Y 목사 반대편 교인들의 거취를 좀 생각해보라는 충고까지 했다.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호주 장로교단 소속 목사로서, 교단법에 어긋나면 바로잡고 Y 목사한테 바른 권유를 해야 함에도 Y 목사가 얼마나 심하게 비방했던지 이제는 나한테로 화살이 날아왔다.
교회 운영권을 놓고 분쟁을 일으키는 쪽은 Y 목사와 그 추종 세력이지, 우리는 교단법에 따라 교회를 지키자는 게 건데,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H 목사가 똑같은 사건을 일으켰을 때는, 호주 임시담임 목사가 그 부당함을 막아낸 경험도 있었다. Y 목사는 설교를 빙자하여 H 목사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그때 내가 이민초청 해준 동생네와 처형네 가족도 영주권을 받아 호주에 이민을 왔다. 그러니까 한인 장로교회에는 부모님을 비롯한 내 친척 교인들이 14명이나 되었다. 모두 한국에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들로서, 그 무렵 교회분쟁의 중심에 서 있던 내 정체성을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논문 심사를 앞두고
그러는 동안 내 논문 심사평들이 속속 접수되었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반론(Defence)을 제출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네 분 중 세 분은 그리 심각한 질문을 안 하셨지만, 유독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윌리암슨(Williamson) 교수님께서는 몇 페이지에 달하는 자세한 답변을 요구하셨다. 그 교수님은 점토 기술(Clay Technology)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점토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분이고 저술도 많이 하셨다.
내 논문에도 그분의 이론을 여러 군데 인용했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대란을 맞을 것 같았다. 그쯤 되면 통과되는 것이 분명했던 게, 네 분 중 세 분이 긍정적이어서 한 분이 적극 반대해도 내 지도교수님께서 반대 안 하시면 결과는 4:1 정도로 통과될 듯했다.
최악의 경우, 내 지도교수님께서 반대하셔도 3:2로 역시 ‘통과’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전원 찬성하면 본부의 학위위원회에서 별문제가 없지만, 반대자가 끝까지 반대를 고수할 경우 제3자한테 재심을 의뢰하는 것은 학위위원회의 몫이었다.
윌리암슨 교수님은, 어쩌면 그리도 세심하게 철자 하나하나까지 지적하시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분 질문의 성격상 능숙하게 답변을 못 하면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의 질의에 대해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잉글스 교수님께 검토를 의뢰했다.
잉글스 교수님께서는 검토에 검토를 더해 교정해 주셨다. 그리고 끝에다 지도교수로서의 의견을 덧붙이셨다. ‘논문 제출자는 영어권에서 교육받은 학생이 아니어서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이 매끄럽지 못한 점에 대해 너그럽게 평가해 달라’는 일종의 사과성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논문 제출자는 초보자인 만큼 지금 수정을 해도 큰 기대는 할 수 없지만, 잠재력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잉글스 교수님께서 그의 자존심을 꺾는 문구들을 삽입하신 이유는, 장기적으로 시간 끄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로 느껴졌다. 나로서는 교수님께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