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윌리암슨 교수님의 평가 결과를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답변서 제출 후, 또 윌리암슨 교수님의 질의서가 도착했다. 그분은 이론적 점토 연구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도로 건설과 연계되는 부분은 이해가 안 된다는 게 주요 메시지였다. 요즘 말하는 융합공학, 즉 도로표면에 도자기 기술 또는 시멘트 기술과 점토가 융합되는 과정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융합기술 부분을 좀 더 매끄러운 표현으로 설득력있게 썼더라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다시 전면 수정을 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많은 실험적인 증명도 곁들여야 하는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답변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받은 학위위원회의 공문
윌리암슨 교수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그 부분은, 어쩌면 새로 개척할 학문 분야가 될 수 있다는 내용과 그 이론에 대해 여러 기술잡지에 발표한 자료들을 동봉하여 재고를 요청했다. 지루한 공방을 끝내고 기다린 지 12개월 만에 NSW 대학교 학위위원회에서 공문이 도착하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편지를 받고 어찌 심장이 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나 자신에게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 편지봉투를 열었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귀하가 제출한 논문을 최종 승인한다. 학위 수여식은 1982년 10월이다.”
그 순간, 내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기쁨보다는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며 설움이 복받쳤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12년 전, 막연하게 계획했던 ‘덤벼’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고, 허황된 욕심이 아니었음이 드디어 증명된 것이다.
그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외국의 대학교에서 학사인증, 공학석사, 공학박사 학위를 마침내 받아냈다는 것은, 사람이 불가능하게 여겼던 일도 목표를 분명하게 세워서 잘 덤비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일이었다. 앞으로도 건전하게 덤벼 정신을 적용하면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도 재확인했다.
그때부터 또 하나의 덤벼 목표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12년 전에 한국을 떠날 때 결심했던 그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후배 양성에 전념하겠다는 애초의 목표에 흔들림이 없었다. 한국의 대학교수로 임용되려면 배경이 있어도 자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제 나는 자격은 갖추었지만, 배경이 없는 상태였다.
대체로 자기가 졸업한 대학교의 조교로 남아 교수님을 돕다가 자기 분야의 여러 사람들과 끈과 맥을 이어 교수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한국의 전형적인 교수임용 방식이다. 그러나 국내든 외국이든 박사학위를 취득이 기본이기 때문에 교수님 심부름하는 조교 생활에서부터 박사학위를 받아야 한다.
한참 동안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어디로 놀러 가신 듯했다. 아침에 준비한 점심을 가지고 노인들 모임에 나가시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아내는 내 공학박사 학위 취득에 대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 또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해석했다.
새출발의 이사
설마 그럴까?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장로교회는 여전히 아수라장 아닌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그 믿음이 눈앞에서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가? 더욱이 상처를 주고도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는 목회자들의 믿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10여 년 동안 한인 장로교회에서 벌어진 분란과 갈등은, 그 믿음을 오히려 아전인수 격으로 악용해온 결과가 아니던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이 교포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교회를 분리시켜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키면서 말이다.
H 목사와 Y 목사처럼 호주 장로교단법을 어겨서라도 독립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거라고 믿는 그것도 믿음인가? 믿음에는 원칙이 없다는 쪽으로 내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 젖고 싶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무서운 전쟁도 불사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도 좀 알 것 같았다. 신앙에 대한 나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시달렸으며, 한인교회를 떠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다.
나는 살고 있던 집(Chesterhill)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겠다고 서서히 마음을 굳혀갔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Y 목사는 예배광고 시간을 이용해, 독립 한인교회를 세우겠으며 한인 장로교회는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H 목사의 야반도주보다는 신사적이었다. Y 목사 나름대로 노력은 했겠지만, 호주 장로교단에서 그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물러나는 꼴이었다.
Y 목사 추종 교인들이 Y 목사를 담임으로 내세운 독립교회가 또 탄생했다. 한인 장로교회에는 호주 장로교단에 남아서 원칙을 지키자는 교인들과 그대로 생고생하는 것보다는 그냥 Y 목사를 따라가서 교회생활을 쉽게 하겠다는 교인들로 갈라졌다. 후자는 Y 목사를 따라 교회를 떠났다. 또 통역 설교를 들어야 하는 부담도 Y 목사를 따라가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결국 분란의 교회를 더 참지 못하고 전교
Y 목사의 일방적인 독립교회 선언 후 한인 장로교회는 3가지 형태로 나누어졌다. Y 목사를 따라가는 교인 그룹과 제2의 한인 연합교회로 합류하는 교인 그룹, 호주 장로교단 소속으로 남아 한인 장로교회를 지키겠다는 교인 그룹이었다. 그러니까 전체 교인 중 2/3는 떠나버렸고, 남은 교인 중에서도 한국교회는 항상 싸움이 잦으니 백인 호주교회로 가버린 사람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결국, 남은 교인 수는 전체 교인의 20% 정도로 한인 장로교회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Y 목사의 탈퇴 선언과 더불어 나도 내 교회 진로를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어, 호주 장로교단에 그 사실을 알렸고, 교단에서 다시 임시 호주목사를 지정해주는 일까지의 임무를 끝낸 후에 백인 호주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부모님께서는 따로 기거하셨기 때문에 가까운 한인 순복음교회에 나가시기로 했다. 처형네 식구들은 다른 호주교회로 잠시 옮겼으나, 결국은 새로 창립한 한인 영락교회에 합류했다. 동생네도 교회문제는 각자 해결하도록 하고 나는 한국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와는 인연을 끊었다.
때를 같이하여, 우리는 상류층(화이트칼라 지역-St. Ives)들이 주로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가 다닌 호주 장로교회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열심히 나갔다. 정말 홀가분했다. 내가 한인교회에서 기득권을 가지려 한다는 오해와 호주 목사님들까지도 나를 교회 분란의 원인으로 생각하던 그 모든 오해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 동네는 비교적 전문직업인들이 살고 있었다. 바로 왼쪽 집은 의사, 오른쪽 옆집은 비즈니스 컨설턴트, 길 건너 앞쪽에는 회계사들이 살고 있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현진이는 그곳 St, Ives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 고등학교는 공립학교 중에서도 아주 수준 높은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명진이는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명진이의 학교는 집에서 5분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부모님은 정부에서 지원한 주택과 연금으로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다. 더욱이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캠프시 지역에 사시니까 한국 음식을 조달하는데도 큰 불편이 없었다.
얼마 전에 호주에 이민 온 동생은 내가 졸업한 NSW 대학교에서 다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에 이민 오자마자 한인교회 사건 때문에 고생이 심했던 처형네도 이민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도 장만했고, 세 명의 아이들도 중·고등학교에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교회로 인해 부모님, 동생네, 처형네, 우리 집까지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