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0월이었다. 나는 이제 공학박사 학위 졸업식장에서 그토록 걸치고 싶었던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 인생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은은하게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입장했고, 맨 앞줄부터 박사학위, 석사학위, 학사학위 순서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내가 백인들 사이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검은 머리 코리안의 양 옆자리에 백인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실로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학위증을 수여하는 순간이 왔다. 강단 한복판에 총장님이 서 계시고, 한쪽 코너에서는 부총장님(Vice-Chancellor)이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학생이 총장님 앞에 서면 총장님은 사각모의 꽃술 방향을 옮기면서 학생에게 졸업장을 주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총장님께서는 행사의 일환으로 졸업장을 수여하시겠지만, 내가 받는 박사학위 졸업장은 그야말로 내 인생에서 특별하고도 감동 그 자체였다. 순간, 가슴이 복받쳤다. 흥분 속에서 ‘덤벼’ 두 글자를 수없이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날 무사히 졸업식을 마쳤다.
수여식장에서의 북받친 감정
단돈 300불만 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절반의 성공은 이룬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내가 갈 길은 멀었다. 박사학위 졸업장을 받는 순간에도 내 가슴속에는 무언가 답답한 것이 남아있었다. 평생직장도 얻었고 생활도 그런대로 안정되었지만, 처음 호주에 갈 때 세웠던 목표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현진이와 명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다시 오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내가 12년 동안이나 호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연구기관이나 대학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것. 연구소나 학회 활동 등이 한국으로 진출함에 있어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역시 나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유일한 연고인 행남사의 기술고문 자격으로 일 년에 한 번 한국에 와서 일주일가량 목포에서 지낸 후 호주로 돌아가는 게 전부였으니 내가 관심을 가지는 기관이나 사람들과는 접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은 내 정체성이 문제였다. 내 전공은 요업(Ceramics)도, 토목공학도 아니었다. 굳이 좀 더 분명하게 밝힌다면, 점토기술(Clay Technology) 또는 토양화학(Soil Chemistry)이라고 해야 할까?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줄이면 토질기술(Soil Technology)에 가깝다고나 해야 할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의 회의
적어도 한국에서 박사 명함을 내밀려면 첨단기술, 예를 들어 반도체(Semi-Conductor), 알루미나 기질체(Alumina Substrate), 정밀요업 기술(High Ceramic Technology), 도로 엔지니어링(Road Engineering) 정도면 된다. 그게 한국의 풍토였다. 점토기술(Clayey Technology)로는 어디에도 이력서를 제출할 수 없는 내 전문성이 문제였다. 내 전공, 즉 세라믹-토목 엔지니어링(Ceramic-Civil Engineering)이 융합하는 이른바, 융합기술을 세계화하려면 학문적으로 무수한 인력을 공급하여 연구투자를 해야만 가능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단계까지는 불가능한 영역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세라믹-토목 엔지니어링(Ceramic-Civil Engineering)의 융합적 학문은 당시 상황으로는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분야를 잘 활용하여 기술을 개발할 수만 있다면, 산업폐기물을 재료로 재활용하는 새로운 기술 분야로 개척될 여지도 있어 보였다. 예를 들어, 산업공정에서의 공해성 먼지나 화력발전소에서 연간 수백만 톤씩 쏟아지는 폐기물, 금속 제련소에서 연간 수십만 톤씩 버려지는 금속찌꺼기들을 토목학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산업폐기물들과 적절한 온도에서 활성화되는 점토형 토양(Clay, Soil)을 혼합하여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게 하면 도로용 기초재료나 건설재료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외국에서는 산업폐기물을 하천에 버리거나 위생처리 하지 않은 채 매립하는 것을 주변 수질오염의 주범으로 보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폐기물 안정처리 기술에 많은 연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의 예를 보더라도 화력발전소에서 수백만 톤씩 쏟아지는 석탄재(Coal Ash)를 댐 건설할 때와 콘크리트 성능을 높이기 위한 시멘트 개량 재료로도 이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그 유명한 후버댐(Hoover Dam) 건설 시 석탄재를 이용하여 항구적인 콘크리트를 만들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상황이다. 이제부터라도 가능한 한 내 기술을 세상에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내 덤벼 행보가 또 시작되었다. 잉글스 교수님과 나는 국내외 세미나에 발표할 몇 개의 논문을 준비했다. 교수님께서는 내 기술에 페로-크레이 공정(Ferro-Clay Process)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세계특허출원을 하셨다. 호주는 물론 미국, 영국, 일본, 한국까지 총 20여 개국이었다. 특허 출원에 드는 비용은 NSW 대학교 직영의 대학교 연구회사(Unisearch Company)가 지급했다. 대학교에서 직영하는 이 회사는 대학교 내에서 개발되는 신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해 특별히 설립된 회사였다. 만약 신기술이 사업화되면 잉글스 교수님과 나는 발명자로서 일정한 수입금인 기술특허사용료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수입금은 대학발전 기금으로 이용하는 제도였다.
점토형 토양을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열처리하여 활성화하고, 그 상태의 토양에다 산화철(Fe2O3)을 촉매제로 사용하면서 강한 양잿물을 소량 첨가하여 굳히는 공정을 특허의 핵심청구 범위로 정했다.
이 특허에 관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호주 도로연구원이었고, 이어 미국계 알코아(Alcoa)라는 회사에서 관심을 보였다. 알코아는 복사이트(Bauxite, 알루미늄 원광) 광물로부터 알루미나(Alumina)를 뽑아내는 세계적인 회사로서, 미국에 본사가 있고 복사이트 광물이 있는 세계 각국 거의 모든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호주 알코아 회사 역시 호주에 매장되어 있는 알루미늄으로부터 알루미나를 정제했으며 그 생산 규모가 대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