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도로연구원에서 더 연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호주 알코아에서는, 페로-크레이 공정을 이용하여 복사이트 정제공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일명 Red Mud : 붉은 갯벌)을 안정처리 하고 싶어 했다. 복사이트는 알루미늄(Al)과 철분(Fe)이 거의 절반씩 혼합된 광물이다. 복사이트를 정제 공정하는 과정에서 알루미늄이 생산되는 한 철분(Fe)이 폐기물로 생산된다.
철분이 들어있는 폐기물(Red Mud)은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인공매립장(Artficial Pond)에 가두어야 한다. 만약 폐기물을 일반 토양에 버리면 그 주변의 토양까지 사멸되다시피 하는 유해물질이다. 따라서 알코아 회사는 인공매립 건설비와 그 유지비가 막대하므로 페로-크레이 공정을 통해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게 목적이었다.
호주 알코아 프로젝트 참여
교수님과 나는, 폐기물을 자원화하려는 호주 알코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의 상대는 호주 알코아를 대신하는 토목재료 컨설팅 회사였다. 그들이 소규모의 공정연구비를 전담하기로 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교수님께서는 호주 알코아와 토목회사를 상대하셨고, 나는 소규모 파이롯(Pilot) 시험공장을 대학교 연구실 내에 설치하여 제품생산에 주력했다. 몇 년 동안이나 해왔던 연구 실험이라, 파이롯 시험공장에서의 생산은 자신 있게 공정을 완료했다.
이제는 대규모 양산체제 단계로 접어들었다. 대학교 실험실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규모여서 멜보른 지역에 있는 토목회사에 모든 자료를 넘겼다. 이제부터는 상업화를 위한 자본, 공학, 설계 등의 모든 일이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또 행남사를 방문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대개 방학을 이용하여 일정을 잡았다. 호주에서는 누구든 1년에 4주 동안의 정기휴가를 얻을 수 있다. 휴가일정은 본인이 정하면 된다. 그래서 일 년에 대략 2~3주일은 행남사를 방문할 수 있었다. 행남사를 방문하면 참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직원들도 대부분 대학교 동문이거나 후배들이었고, 나는 그 회사의 기술고문 자격이어서 점토와 관련, 기술사원들에게 열심히 강의로 보답했다.
주기적인 행남사 방문과 친지들과의 만남
업무시간 외에는 고향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적지나 유달산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출생지인 전라남도 해남에도 가보았다. 회사직원들과의 회식도 잦았고 중·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속마음은 기회가 닿는 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정보수집에 관심이 더 많았다.
행남사에서 어느 정도 머문 후에는 반드시 일주일가량 일찍 서울에 올라왔다. 그 기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못 만난 사람들과 은사님들도 찾아뵈었다. 그리고 내 분야에서 앞서 가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폭넓게 접촉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바삐 보내다 보면 어느새 호주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한국의 산업이 눈에 띌 정도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선 수출산업이 달라졌고, 무언가 신기술로 사업을 확장해 보겠다는 사람들의 의식도 느껴졌다. 세라믹 자동차, 자기부상열차, 반도체, 알루미나 제조판, 경량재료…!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해서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 기술을 찾는 이들은, 내 전공과는 관계없는 사업가들과 대학교수들, 연구소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길을 모색
암튼, 서울에서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가 공학박사라는 것에는 관심을 보이다가도 전공 쪽으로 대화가 깊어지면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내가 한국에 진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정보라도 얻을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 내 연구 경력으로는 한국의 대학교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호주에서의 내 특허 상황은 달랐다. 페로-크레이 공정이 여기저기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호주 알코아 회사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가끔씩 나하고 접촉을 하곤 했는데, 물론 잉글스 교수님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교수님께서 은퇴를 결심하신 것이다. 한국 같으면 한참 더 일하실 것 같은데 조기 은퇴를 결정하신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태산같이 믿고 의지하던 교수님께서 고향인 태즈메이니아(Tasmania)로 가신다는 거였다. 나는 교수님의 은퇴가 참으로 불만스러웠다. 좀 더 나를 키워주시면 좋으련만! 세상일이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른 회사와 연결이 되었는데, 호주 서부광산회사(Western Sand Mining Company)였는데, 일마나이트(Illmanite), 지르콘(Zircon), 모래(Sand) 등의 광물들을 세계 각처에 수출하는 거대한 광산회사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호주 동부지방에서 규조토(Diatomite)를 대량으로 채광하고 있는데, 그 광물의 용도를 넓히기 위해 페로-크레이 공정을 적용할 수 있겠는지 여부였다.
이 규조토 광물은 ACI 연구소에서 도자기 건조 성형(Ceramic Dry-Process)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었고, 내게 박사학위를 안겨준 아주 친밀한 광물질이었다. 규조토는 낮은 온도에서 알맞게 열처리해주면 세라믹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기공성이 높아서 공기청정 재료, 물 정화용 필터 재료, 페인트(Paint) 점성조절 재료, 시멘트 강화 재료, 악취제거용 재료, 콘크리트 부식방지 재료 등등 수도 없이 활용할 수 있다. 낮은 온도처리와 페로-크레이 공정은 그 내용 자체가 같은 기술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쉽게 대화할 수가 있었다.
서부 호주 광산회사와 대화를 시작할 무렵, 잉글스 교수님은 태즈메이니아(Tasmania)로 떠나셨다. 페로-크레이 공정 특허 건은 교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후에도 계속하실 예정이며, 필요하면 시드니를 방문하시겠다고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