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그리퍼스(Mr. Bob Griffths, 작고)은 벽돌제조 산업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호주 요업(Ceramic)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발이 넓은 분이었다. 호주 요업학회에서도 가끔 발표를 했기 때문에 나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밥 그리퍼스가 나를 찾아왔다. 페로-크레이 공정 기술에 관한 의문을 풀고 싶어서였다.
밥이 제조하고 싶은 벽돌은 제철소(B.H.P 회사)에서 사용되는 내화벽돌(Refractory Bricks)을 에워싸서 고열을 차단하는 단열벽돌(Insulation Bricks)이었다. 제철산업뿐만 아니라 열을 취급하는 산업분야에서는 필요한 벽돌이다. 단열벽돌을 제조, 생산하는 데에 페로-크레이 공정을 응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페로-크레이 공정
열을 차단하는 벽돌을 제조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료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퍼라이트(Perlite), 버미큐라이트(Vermicullite) 같은 자연물과 점토에 연소물질을 혼합하여 소성 과정을 거쳐 고의적으로 기공이 생기게 해서 제조하는 벽돌 등 다양하게 단열벽돌을 제조한다. 규조토도 단열벽돌 제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특성이 있다. 규조토(Diatomite) 시장 확대용 제품개발을 두고 서부광산회사와 한창 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밥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규조토와 페로-크레이 공정을 이용하여 그가 원하는 단열벽돌 샘플을 만들어 주었다. 사실 페로-크레이 공정 기술은 의외로 간단하다. 규조토를 낮은 온도에서 열처리하여 수분을 날려버리고, 여기에 철분(Fe)이 함유된 점토류의 원료(예: Bentonite)를 가하여 건조 성형(Dry-Process)하면 벽돌이 완성되었다. 이때 알칼리 물질을 넣어 공기 중에서 굳어지는 제품을 만들 것인지, 다시 소성 공정(약 900℃)을 거쳐 벽돌을 생산할 것인지는 용도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두 가지 경우의 샘플을 모두 제작하여 그에게 넘겼고,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즉시 서부호주광산회사 시드니 사무소장에게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하였고, 밥과 서부광산회사, 나를 포함한 3자 회의를 제안했다.
얼마 후에 서부호주광산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서부호주광산회사는 원료공급자로 남을 것이며, 밥 그리피스가 회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한테 소액의 연구프로젝트를 주었는데, 페로-크레이 공정을 이용한 규조토 단열벽돌 개발 건이었다.
밥 그리피스의 제안
그들의 규조토와 페로-크레이 공정을 상업적으로 연계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차피 규조토로 단열벽돌을 생산하겠다는 밥 그리피스가 회사와 서부호주광산회사 중 누가 먼저 기술을 확보하느냐가 쟁점이었고, 그 두 회사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밥 회사의 구성원은 건축사, 건축설계사, 점토광산회사였고, 밥 그리피스가 중역이었으며 그들이 일정 비율의 주주로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밥 그리피스가 우리 학교에 다시 찾아왔다. 이미 BHP(Broken Hill Proprietary) 제철회사나 다른 회사들에 공급하는 것까지도 얘기되었다며, 단열벽돌이 성공적으로 생산되면 자기 회사의 연구책임자로 동참해달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때 서부호주광산회사의 작은 프로젝트 연구제안서를 준비하던 중이라 고민스러웠다. 지금의 편안하고 영구적인 직장에서 그대로 남을 것인지, 또 하나의 '덤벼'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내가 서부호주광산회사에 그 사실을 알려주자, 그들은 지금의 프로젝트를 밥 회사와 공동으로도 해볼 생각이니, 규조토 페로 -크레이 공정 기술개발을 계속하자고 했다.
사실 서부호주광산회사에서는 누가 무엇을 하든 그들의 규조토 원료만 많이 팔 수 있으면 된다는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밥 그리피스에게도 설명했다. 밥 그리피스 역시 손해 볼 수는 없었다. 서부호주광산에서 원료공급을 받게 되면 원료조달만큼은 걱정 없다는 것이었다.
연구책임자 자리에 마음이 쏠려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개인 기업은 위험천만한 지대일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내 전공이 언제쯤에나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그 기술을 앞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홍보해 주시던 잉글스 교수님도 은퇴해 버렸다. 그런 실력자들이 몇십 명 달려들어 연구 발표를 한다 해도 페로-크레이 공정이 세상 속에 파고드는 건, 내 생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밥이 제시한 연구책임자 자리에 마음이 쏠렸다. 밥은 연구소장직으로 소정의 지분을 제시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연구개발 책임자로서, 직함은 연구소장(Research Director)으로 마지막 조율을 하며 제의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이 기울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구책임자로 있으면 연구발표라는 명목으로 시간 면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고, 한국으로 진출할 때도 연구소장 경력이 좀 더 유리할 것 같았다. 15년 동안 백인 밑에서 지시받던 입장에서 이제는 내가 그들을 어느 정도 지휘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검은 머리 동양인의 열등감도 한 몫 한 셈이다.
또 덤벼보기로 작정했다. 연구소는 우리 집에서 약 90분 정도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거리였다. 연구소라기보다는 회사 안의 실험실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나는 그들과 고용계약을 맺었다. 월급은 별도로 하고, 제품의 이익금에서 10%를 보너스로 받기로 했다. 내가 대학교 연구소를 사퇴한 때가 1986년이었다.
현진이와 명진이의 우수한 학업에 마음이 흐뭇
그때 현진이는 고등학교 11학년이 되었다. 호주에서는 고등학교 10학년이면 직업학교로 가는 경우도 많지만, 11학년생은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다. 현진이는 11학년 대열에 합류했다. 동시에 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Vice Captain)이자 학교신문 편집책임자로서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특히 선생님들이 현진이를 아주 좋아하셨는데, 그 이유는 일을 맡기면 책임 있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취미 삼아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서 파트타임 라디오 아나운서로도 활동했다. 현진이가 대견스러웠다. 다른 아이들처럼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처지인데도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호주교회 청년들과 어울려 교회활동도 넓혀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장한 청년답게 그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명진이는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선생님으로부터 모범생 표를 받아오기도 하고 친구도 많았다. 부모가 돈벌이하느라 잘 돌봐줄 수 없었는데도 아이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현진이의 고등학교가 공립학교로서는 상위권이라는 입소문이 교포사회에 퍼졌었다. 한국에서 새로 이민 가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드니에 이미 정착한 교민들도 하나둘 우리 동네로 모여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