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 한국인들은 보이지 않았고, 나 또한 어떤 형태이든 한국인들이 모이는 한인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그 무렵(그렇게 기억함)이었다. 호주교회 담임 목사(Rev.Broadhead)가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는, 나를 엘더(Elder) 후보로 교회에 승인 요청할 테니 그 직분을 수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수십 번 NO! NO! ……거절하였지만 목사님께서는 며칠 동안 전화 또는 직접 방문하셔서 똑같은 부탁을 반복했다.
우리는 호주 교회생활이 백% 만족스럽지는 않았어도 차츰 교인들과 친교도 맺고, 서로 초청식사도 할 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국인들끼리 만날 때의 그 짜릿한 동포애는 없었으나 교인이라는 가명(?)을 쓰고 비난을 일삼으며 서로 상처받는 일은 없었다.
한인교회 목사님의 엘더(Elder)직 권유
내가 교회 엘더직을 계속 사양한 이유는 첫째, 내가 엘더로서의 자격이 부족했고, 둘째, 백인들의 교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을 거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 두 이유 중 후자는 목사님께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다. 목사님께서 설명해주신 엘더(Elder)는, 한국에서 말하는 장로의 개념이 아닌, 교회 내의 전반적인 운영을 감독하고 목사님 활동에 협조하며 교인들을 보살피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한국에서의 당회와 같은 역할임은 틀림없었다. 한국의 당회는 교회운영 전반을 간섭하게 되어있다. 당회가 재직회보다 상위기관인 것을 남용하는 데 반해, 호주교회에서는 재직회 역할을 하는 운영위원회(Commitle of Management)가 독점적으로 교회운영을 하고 있고, 운영위원회의 집행사항을 장로회에서 추인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기본적인 교회운영은 운영위원회의 몫이었다. 한국에서는 교회 ‘엘더(elder)회’가 당회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선거도 하며 교회 최고기관으로 행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거듭된 요청에 결국 수락
목사님께서는 거듭거듭 내게 요청하셨고, 결국 나는 노회 승인 요청을 하게 되었다. 노회에서는 노회 산하 교회에서 올라오는 엘더 임명 요청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성경 위에다 선서하는 걸로 인정했다. 그렇게, 소위 한국에서 말하는 장로 직분으로 간주되는 엘더 임명을 결국은 받게 되었던 것이다.
호주 이민생활 16년째에 접어들었다. 영어 때문에 웃고 울던 긴 세월이었다. 내 전공 영어는 그런대로 소통되었지만, 교회 행정상의 영어소통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 그러나 생계형 영어소통은 아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엘더 임명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엘더 임명식은 따로 떠들썩하게 치르지는 않았다. 일요일 예배 중에 교인들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호주 장로교단의 문답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났다. 엘더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요란하게 축하하는 한국식 장립식과는 달랐다. 엘더의 역할은 목사님의 월간 활동, 가끔 목사님 따라 장례식에 가는 일, 운영위원회에서 올라오는 각종 결정 사항 승인 등 비교적 단순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호주 장로교단으로부터 괴상망측한 일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내가 호주 장로교단에서 한국교회 문제를 취급하는 특별위원에 추천된 것이었다. 그 특별위원회는 호주 장로교단 소속 목사와 엘더를 합해서 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특별위원회가 하는 일은, 호주 내의 한국인 교회들이 항상 분란을 일으켜 분열되기 일쑤이며 독립교회를 창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므로 교단차원에서 그 원인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한인교회들이 얼마나 호주 장로교단을 이용하고는 독립을 주장하며 나가버리고, 싸우고, 예배당을 빌려달라고 했기에 한인교회 문제만을 별도로 취급하는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졌을까? 내가 호주교회의 한국인 엘더라는 것과 한인교회를 처음 창립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을 고려한 것 같았다.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특별위원회 참여를 거절했다. 첫째, 호주장로교단 소속의 백인 목사와 엘더들은 이민자 교회의 성격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 둘째, 호주 장로교단을 이용하는 한인교회의 속셈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자칫, 한국 교포사회에서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는 또 하나의 사안이었다.
한인교회에 연결되는 것은 원치 않아
우여곡절 끝에 겨우 호주교회에 들어가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상황에서 또다시 한인교회와 연결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교단에 내 의견은 제시했다. 호주 장로교단을 이용하여 이민에 성공하고도 자기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독립교회를 창립하는 악순환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호주 장로교단 소속의 한인교회는 몇 년 정도 유예기간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 기간 호주 장로교단의 교단법을 성공적으로 잘 이행한 경우에만 한인 목사를 청빙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청빙된 한인 목사는 임시 입국비자를 주선해서 몇 년 동안은 호주 장로교단 소속으로 남아있도록 강제규정을 두어야 한다고도 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목사를 추방하는 것을 제도화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내 조언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초청을 받고 가서 담임목사 직분을 수행하다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가버리는 한인 목사들의 태도를 나는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나중에도 여전히 분열과 창립을 반복하며 시드니의 동네마다 한인교회가 들어서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명을 짊어진 목사로서의 사역에 취지를 벗어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영주권을 얻어 생계 해결에만 혈안이 된 한심한 현상이 언제나 끝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양가죽을 쓴 이리가 양 행세를 하는 것처럼 그들의 가면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서울에서 호주를 방문한 H 교수 영접
내가 대학 연구소를 사퇴하고 새로 옮긴 회사는 그 무렵, 제품생산에서 시장공급까지 많은 투자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실험결과에 따라, 생산과정에서 너무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투자자들에게는 당연히 걸림돌이었고, 따라서 사업전망이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도 새로 시작한 사업의 참여자이고, 기술개발이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책임감이 느껴졌다. 내 장래가 걱정스러웠다. 투자자들 간에 이견이 많았다. 호주생활에서 또 하나의 어려움이 예견되었다.
그렇듯 어려운 시기에 서울의 C 대학교 교수님 일행이 시드니를 방문했었다. 그분들 중 H 교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시게 된 계기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과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H 교수님은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에서 열리는 ‘동남아 국가 감사원장 회의’에 한국 감사원장 자문자격으로 방문하셨다.
H 교수님 일행은, 염치없지만 김치와 된장국 생각이 몹시 나서 우리 집에 들르겠다고 하셨다. 아내는 그 두 가지에다 한국식 양고기 요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H 교수님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법학자였고, 당시 감사원장 자문위원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류층 인사로 광범위한 활동을 하고 계셨다.
나는 H 교수님께 내가 하는 일과, NSW 대학교에서의 공부와 페로-크레이 공정 기술에 관해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폐자원을 자원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술이 될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많이 끄덕이셨다. H 교수님도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기술로 이해하셨다. 한국에 돌아가시면 최대한 소개하여 그 기술을 한국사회에 알려보겠다고 말씀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