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개최국에서는 항상 또 다른 국제회의가 열린다.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 대회가 개최되고 ‘국제도로회의’가 열렸다. 도로 유엔총회 같은 국제회의였다. 나는 그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발표할 논문을 오랫동안 준비했다. 발표자는 물론 내 이름이었고, 공동참여자는 나하고 같은 대학교(NSW) 토목공학과에서 도로를 전공하고 일찍 한국에 귀국한 동생과 다른 지도교수(Professor.W.O.Yandell)였다.
행남사 방문일정을 조절하여 행남사에 가서 일을 끝내고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토질의 열적 안정처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도로공학(Road Engineering)과 토질화학이 융합된 주제가 청중들한테 생소할 수밖에 없었고 의외로 질문이 많았다. 논문 발표 후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공적인 발표라고 생각되었다.
K대학 L총장을 만나 교수 임용에 한발짝 다가가
호주로 출국하기 며칠 전에 나는 C대학교 H교수님께 인사차 전화를 드렸다. H교수님께서 몹시 반가워하시며 호주에 가기 전 시간을 내어 만나자고 하셨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나는 그분의 연구실에 찾아가서 잠시 만나 뵈었다. H교수님께서는 한국에 귀국하시자마자 여러 대학에 내 소개를 하셨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강원도에 있는 K대학교 L총장님한테 나를 소개하신 말씀을 하셨다.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 기회가 닿는 대로 한 번 만나보자는 L총장님의 연락을 받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차일피일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며 사과도 하셨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K대학교 L총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강원도 폐광산에서 무제한으로 쏟아지는 폐기물을 자원화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임남웅 박사가 한국에 잠깐 귀국했다’고 소개하셨다. L총장님께서는 가능한 내가 호주로 돌아가기 전에 K대학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면담을 허락하신 것이다. H교수님과 L총장님은 친한 친구사이라며 반말로 대화하시면서 면담시간을 정해주셨다.
행운일까?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일일까? 내 입장에서 K대학교 L총장님과의 면담이 성사되다니!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걸 경험상 알고는 있었다.
나는 다른 약속들을 모두 취소하고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군에서 복무할 때 물자보급 수송 때문에 가평-춘천은 가보았지만 춘천은 초행이었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동안 기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오후 1시쯤 춘천에 도착했다. L총장님과의 면담시간은 오후 3시였기 때문에 2시간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택시를 타고 K대학교를 둘러봤는데 불과 십분 정도 걸렸다. K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동안 마치 내가 그 대학교 교수인 걸로 착각될 만큼 마음이 느긋했다.
오후 3시에 L총장실을 노크하니, 약속을 금방 알아챈 비서가 총장님께 나를 안내해 주었다. L총장님은 키가 아주 크고 거구였다. 총장에다 대통령 교육자문까지 한 거물급 인사를 이전에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L총장님께서 내 이력서를 접수하셨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능한 한 우리 K대학교에 오셔서 함께 큰일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라고 획기적이고도 아주 희망찬 말씀을 하셨다.
내가 참여할 수 있는 학과는 재료공학과(?)라고 하셨다. 그 학과에는 나하고 같은 대학 동기생이 학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L 총장님께서 한사코 친구인 H교수를 소개하시겠다며 H교수를 총장실로 불러주셔서 내심 반가웠다. H교수가 총장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반가워할 줄 알았던 H교수가 의외로 “네가 웬일로 여기에 왔니?” 하는 듯한, 왠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H교수는 평소에도 잘 아는 사이였고, 그 친구가 조교이던 시절에 내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보내기도 했었다.
나를 대하는 친구 H교수의 이상한 태도
L 총장님은 H교수에게 ‘두 사람이 잘 얘기하라’고 당부하셨고 우리는 총장실을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나는 서슴없이 내가 거기까지 가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H교수의 반응은 뜻밖에도 사무적이었다. L총장을 면담하려면 절차상 학과장인 자기를 먼저 찾아왔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자기를 무시하고 바로 총장과 면담한 것이 H교수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임용 시절대로 해서는 안 될 실수를 내가 해버린 것이었다.
K대학교 교수 임용에 내 친구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내 오판이었다. H교수와의 대화는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했고 가슴속이 텅 비는 듯했다. 한국에서 대학교수가 되려면 인맥, 학맥에다 말 못하는 재정적 뒷받침도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 친구가 이상한 것을 바라는 친구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과장의 위치에 있으니, 그 친구가 이끌어주기만 하면 나도 K 대학교의 교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만큼 둘 사이의 공기는 차가웠다. 무언가 좋지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직감했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친구가 돈을 바라는 건 절대로 아닐 테고, 설사 돈이 필요하다 해도 한국의 교수 자리를 포기할지언정 그런 돈은 처음부터 내게는 아예 없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춘천을 방문했다가 벙어리 냉가슴으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C학교 H교수님한테 상황보고를 하고 후속조치를 간곡히 부탁했다. H교수님은 그 내용을 파악해서 연락할 테니 호주로 잘 돌아가라고 당부하셨다. 희망 반, 실망 반, 설마 반의 답을 가슴에 안고 나는 시드니로 돌아가서 회사업무에 복귀했다.
그런데 이민생활을 접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려는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한인교회로 인한 가슴앓이는 없어져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백인들의 영어를 정복하기는 어려웠다. 뿌리 든든한 영어를 하려면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영어실력을 쌓아야지, 중간에 뛰어들어 원어민들의 영어를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할 뿐이었다. 따라서 호주교회의 장로 직분 수행도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었고, 별의별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호주 목사님께서 일요일 설교를 하실 때, 그분의 감정에 내 감정이 충분히 이입되고 흡수되지 않는 것 또한 영어소통에 한계가 있기 때문으로 이해되었다.
예감대로 교수임용의 부결
그 무렵, 한국 K 대학교 H 교수(친구)한테서 편지가 왔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좋은 소식일까 기대하며 봉투를 열었다. 편지는 한 장이었다. 한 장 전체가 인사말이고, 끝 부분에 임 박사의 K대 교수임용은 학과 교수회의에서 거절되었다는 결론이었다. 설마 맨입으로 교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컸었지만, 막상 최후통첩을 받고 보니 K대 H 교수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가슴속에 꽉 차올랐다. 그러나 학과 전체 교수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하니, H 교수 개인에게만 화살을 돌릴 일도 아니었다.
나는 H 교수에게 ‘잠깐이었지만, 내 일에 신경 써주어서 매우 고맙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K대 H 교수의 편지를 받은 지 2주 만에 C대학교 H 교수님의 편지가 왔다. 그런데 그분의 편지내용은 달랐다. LSJ 총장님께서 해당 학과 교수회의를 주재하셨는데, 교수들 중에서 친구인 H 교수가 적극적으로 반대해서 나를 임용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안 맞아도 좋을 화살이 내 가슴에 꽂히고 말았다. 친구 H 교수는 동료 교수들의 반대 때문에 내 교수임용이 불가능하다며 책임을 그들에게로 돌렸다. 그럴 수밖에! 자기가 나서서 반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친구 관계였으니까….
그의 도피성 편지를 이해는 했지만, 차라리 자기가 앞장서서 임용을 반대했다고 했으면 화가 덜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교수임용 탈락과 친구 배반이라는 두 상황을 겪으면서 내 인생의 진로가 덤벼 만으로는 어렵다는 것도 배웠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며 시간은 여전히 잘도 흘러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