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재 공업 (66화)

우여곡절 끝에 새로 개발된 제품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며 서서히 시장으로 판매되는 듯했다. 회사에서의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제품개발이었고, 기술 분야의 중역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회사 운영에는 내가 철저히 배제되는 느낌을 받았다. 백인들의 그런 태도 역시 다른 인종들로 하여금 백인사회에 적응을 못 하게 하는 뿌리 깊은 갈등 요소가 되는 것이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백인들이 쥐고 있었다. 칼날만 잡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피를 볼 수밖에 없다. 피를 흘려가면서 칼을 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 그들과의 생활이었다. 그때 서울에 있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박(?) 부원장의 편지가 왔다. 수신인 주소가 내 연구소인 걸 보니, 지난번 ‘세계도로총회’에서 내 이름을 발췌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박 부원장의 편지

‘한국전력(주)의 화력발전소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석탄재(Coal ash) 처리방법 중 재활용을 위한 자료’를 부탁한 편지였다. 호주에서는 1960년대부터 석탄재 중에서도 입자가 미세한 비산재(Fly Ash)를 도로와 콘크리트에서 필라 재료 및 혼화 재료로 적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1945년부터 재활용되어왔다. 따라서 그런 자료를 보내주는 일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잉글스 교수님의 연구, 토질 안정처리에서 화력발전소 비산재 부분이 여러 곳에 소개되어 있었다. 이미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선진국에서는 산업표준화(Standard)까지 제정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비산재가 산업폐기물로 규정되어 있고, 그에 대한 자료가 없어 국가 지정 연구소에서 자료를 부탁할 정도이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즉, 1년에 수백만 톤의 비산재가 쏟아져 나와 이들을 저장할 매립투기장(Artificial Landfill Ponal) 건설과 관리비용이 기하학적으로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산업폐기물을 산업적으로 재활용하는 문제는 내게는 아주 익숙한 주제였다. 건설과 관리비용을 줄이는 것도 국가 예산을 절감하는 길이지만, 그것을 재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적이고 환경적인 일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내가 가지고 있던 자료와 도서관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박 부원장에게 소포로 보내드렸다. 박 부원장께서는 고맙다는 답장을 다시 보내오면서 기회가 닿으면 연구원에 들러 간단한 세미나 발표를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래서 나는 1년마다 행남사를 방문할 때 시간을 내기로 하고 한국방문 시기를 알려주었다.

방문 길에 세미나 주제발표

나는 곧바로 발표 준비에 들어갔고, 드디어 행남사 방문 귀국길에 양재동에 위치한 연구원에서 세미나 주제를 발표했다. 그날 발표 내용은, 비산재가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활용되어오는 현황과 비산재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전력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산재를 그대로 방치하면 산업폐기물로 경제적 손실은 물론 환경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지만, 특성을 살려서 자원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미나 참석자들 중에는 연구원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민간 사업자들도 있었다. 그중 한국 최초로 비산재를 시멘트 혼화 재료로 레미콘에 적용하고 있던 S콘크리트회사의 기술자들이 많은 질문을 했다. 폐기물 처리에 대한 문제가 예상보다 심각해 보였다.

이튿날이었다. 출국 하루 전날이었는데, 한국 비산재공업(주) 박 사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회사는 원시적인 방법으로나마 비산재를 콘크리트 제품에 재활용하고 있었다. 박 사장님(작고)께서는 나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다. 그분의 회사는 한남동에 서울사무실이 있고, 공장은 충남 보령의 한국화력발전소 근처에 있다고 하셨다.

박 사장님이 내가 묵고 있던 호텔로 찾아오셨다. 비산재를 시멘트 혼화 재료로 적용할 때의 기술적인 애로점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폐기물법에 저촉되어 시장 확대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소연하셨다.

한국의 환경법규에 대해서는 내가 큰 도움을 줄 수 없었으나, 기술적인 문제 해결 부분은 협조하기로 했다. 그분이 겪고 있는 기술적인 문제는 비산재의 품질 균일성이었다.

보일러에서 석탄을 연소할 때 완전연소 되지 않고, 남아있는 미연탄카본(C)이 비산재의 품질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 탄소가 비산재에 많이 남아 있을수록 시멘트 혼화 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 비산재를 콘크리트 혼화 재료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가능한 카본량(C)이 적게 남게 하기 위한 기술적인 노력이 미국에서 오랫동안 진행됐으나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는 난제이다.

내가 호주에 돌아가서 비산재 품질을 향상시킬 기술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박 사장님과 약속하고 출국했다. 나는 시드니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호주에서는 어떻게 비산재 품질을 향상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뉴캐슬(Newcastle)에 있는 석탄 화력발전소에서 대량 발생되는 비산재에 정제시설을 하여 품질 균일화를 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미연탄카본에 많이 들어있는 입자들을 제거하고, 일정한 비산재를 채집하여 균일하게 시장에다 공급하는 것이었다. 호주에서는 정제된 비산재의 콘크리트 시장 공급력이 부족할 정도로 그 가동률이 100%에 이르고 있었다. 건축공사는 물론 도로, 항만, 댐 공사와 같은 대형 토목건설에도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비산재를 생산하고 있었으니 품질이 좋을 리가 없고 시장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주의 비산재 회사에서 비산재 품질만 연구하는 전문가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기술자로부터 많은 기술 자료를 얻을 수 있었고 점점 대화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비산재에서 카본(C) 제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정제시설을 갖추면 박 사장이 고민하는 문제는 해결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비산재 정제시설 설계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도 매우 협조적으로 자료를 주었다.

비산재공업 박 사장님과의 업무 협조

그 모든 사실을 박 사장님한테 알리자, 박 사장은 그 정제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곧바로 시드니를 방문했다. 그러나 비산재 정제시설의 한국 이전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정제시설에서 일정한 크기의 비산재 입자만 골라주는 분리기가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제기술의 핵심부품이다. 분리기를 호주가 아닌 다른 국가로 이전하려면 미국 회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호주와 미국 간의 계약을 변경하거나 미국 회사를 찾아가서 한국으로의 이전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정제시설에 관한 설계는 호주에서도 가능하지만, 분리기는 호주에서 제작될 수 없다는 게 딜레마였다. 그것은 박 사장이 잠시 호주에 머물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박 사장님한테 그 사실을 알려주며 “시간이 걸리는 문제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에 내가 부딪혀 보겠다.”라고 했고, 그는 돌아갔다.

사실, 분리기를 미국에서 호주로 가져왔다가 한국으로 다시 보낼 게 아니라, 설계시기에 맞춰 미국에서 한국으로 직접 보내는 게 더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직접 수출할 수 있도록 호주 설계회사와 미국 회사 간의 계약을 보완할 것을 조언했다. 물론, 호주 설계회사에서도 그렇게 계약을 보완해도 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은 했다.

미국 회사에서 한국으로의 수출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좀 더 깊이 대화를 나누었다. 거기에는 호주와 미국 간의 계약상에 복잡한 부분이 있긴 했다. 호주 설계회사가 제3국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걸림돌이었고, 그때 호주 설계회사가 한국 진출에 적극성을 띌 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긴 대화 끝에, 결국 호주 설계회사에서는 정제시설 도면만 구입하고 분리기는 미국에서 직접 수입하기로 합의했다. 동시에 호주 설계회사 정제시설 도면에 대해 미국의 승인을 받도록 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