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진전 사안들을 서울의 박 사장님께 보고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특히, 호주와 미국 간의 합의 시간이 무척 길었다. 박 사장님이 연거푸 시드니를 방문한 끝에야 최종 합의가 이루어졌다. 설계는 호주에서, 분리기 수입은 미국에서, 시공은 한국에서 하고, 마지막 총설계와 시공감독은 호주에서 하기로 했다.
비산재 정제시설 프로젝트를 하는 관계로, 나는 행남사에 이어 (주)한국 비산재공업의 고문 역할도 맡게 되었다. 근무 중인 연구소를 무단결근할 수도 없어서, 진행 중인 비산재 프로젝트를 내가 근무하는 연구소와 연결해 놓았다.
이제는 공식적인 출장 형식을 갖추어 한국을 방문할 수가 있었고, 출장비, 한국 체류비 및 여행비는 호주 설계회사에서 우리 연구소로 입금하도록 했다. 물론 그 비용은 (주)한국 비산재공업에서 호주 설계회사에 지출하도록 조처되었다.
비산재 프로젝트 총감독으로 자주 한국 방문
행남사는 1년에 한 번 방문하고, 비산재 프로젝트를 총감독하는 호주 설계회사 팀원으로 자주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 기회는 또한, 궁극적으로 한국에 영구 귀국하려는 애초의 내 목표 달성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비산재 프로젝트 시공 총감독의 일원으로 한국에 오면, 한국 관련 학계소식은 물론 레미콘 회사 관계자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레미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S 레미콘이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다. 그 회사는 레미콘 단일 품목으로 연간 몇백만 톤을 국내 건설시장에 공급하고 있었다.
그 회사가 비산재를 레미콘에 적용하고 있었으므로 비산재의 연간 소모량이 대단했다. 그 회사 역시 비산재의 품질만 균일하다면, 소모량이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따라서 그 무렵의 비산재 정제공장 프로젝트가 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프로젝트 수행기간 동안 나는 가끔 한국에 들를 때마다 S 레미콘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비산재 프로젝트 5차 한국방문 시, 공사 진척 상황을 점검하고 나서 호주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에 올라 한국 신문을 펼쳤더니, 한국의 미래 교통정책에 관해 교통전문가들이 대담하는 기사가 신문 몇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신부용 박사였다. 첫눈에도 틀림없이 내가 평생 찾고 싶었던 그 이름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신부용이 맞다면 45년 전에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만나볼 수 없었던 바로 그 친구임이 분명했다.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어릴 적 그 친구의 모습이 확실했다.
중학동창 신부용
그 친구는 1‧4 후퇴 때 황해도에서 목포로 피난 왔고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 친구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수재였다. 키가 작고 예쁘장한 모습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포지역의 피난민 촌에서 기거할 때 그 친구 집에 놀러가 밥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이사를 왔고, 그 후로는 소식을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시드니에 도착한 후 내가 먼저 그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얼마 후 그 친구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제 우리는 신문기사를 통해 45년 만에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 친구의 전공은 나하고 관계가 없는 듯했지만, 크게 보면 교통과 환경은 아주 밀접한 융합관계인 것이다.
그 친구 편지에 의하면, 캐나다에서 교통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재직하다가 해외과학자 유치계획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로 부임한 경우였다. 우리는 간단한 편지를 두 차례 더 주고받은 후, 내가 한국으로 출장을 가면 한 번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때 한국에서 또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S 레미콘 기술담당 이사님께서 호주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호주 레미콘 업계와 비산재 응용 부분에 대해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여러 방면으로 접촉하여 그들의 시드니 방문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했다.
그들은 시드니를 방문하여 석탄 화력발전소에서 비산재를 정제 공정하는 모습과 제품을 똑같이 포장하는 과정까지 모두 볼 수가 있었다. 다양한 콘크리트 제품이 시멘트 혼합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폐기물로 취급되며 환경법으로 묶어놓고 있는 비산재가 그곳 호주에서는 고급 제품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제 비산재가 건축재료, 토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더구나 자원도 풍부한 부자나라에서 폐기물까지 자원화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사실에 그들은 호주 회사를 극찬했다.
S레미콘과의 기술 협력
또한, 그들은 광산에서 발생하는 폐기물들의 재활용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 S 레미콘 관계자들이 가장 확인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S 레미콘 회사는 전국에서 몇 군데 골재생산용 석산을 운영하고 있었다. 큰 돌을 깨고 부셔서 레미콘에 사용하는 골재를 생산하면 석산 부산물이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그것을 처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석산에서 큰 돌을 캐다가 잘게 부수는 과정에서 먼지를 방지하는 시설에 큰 비용이 들고 있었고, 부수는 과정에서 골재 크기를 골라낼 때 많은 물로 세척하는 과정에서 찌꺼기 처리비용이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먼지나 찌꺼기 처리 비용은 그런대로 해결되지만, 석산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하루도 끊이지 않는 실정이어서 어떻게든 석산 부산물의 재활용 방법을 찾는 것이 이번 시드니 방문의 목적’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환경법이 날로 강화되고 있어서 레미콘 사업을 하는 한, 그리고 석산에서 골재를 생산하는 한은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미콘 사업에서 골재는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이다. 골재생산을 위해 큰 돌을 부술 때 일어나는 먼지나 세척과정에서 약 40% 정도 발생하는 찌꺼기는 모두 돌가루이다. 돌가루를 자원화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라믹(Ceramic) 산업에서는 어떤 원료든 일단 분쇄를 해야 한다. 모든 분쇄 과정에서 분쇄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분쇄비용이 적게 들수록 경제적이다.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은 나처럼 세라믹-시빌-엔지니어링(Ceramic-Civil Engineering)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한테는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S 레미콘 회사의 큰 문젯거리인 먼지와 찌꺼기도 돌가루이면서 아주 미세한 입자이다. 즉, 분쇄하여 얻으려면 상당한 비용이 드는 재료였다. 따라서 이미 분쇄된 돌가루를 건설재료, 도로 부분, 아스팔트 필러 재료, 시멘트 혼화 재료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단점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S 레미콘 기술이사님은 한국에 귀국하는 대로 상부에 보고하고 정식으로 연구제안서를 내도록 안내하겠다고 약속한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