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레미콘 연구용역 (68화)

한국 비산재 정제공장 건설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나는 호주 설계회사와 긴밀히 협조하여 차질 없이 수행하도록 항상 접촉했다. 호주사람들은 약속을 하면 거의 백 % 지킨다.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공장건설 공정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후 S 레미콘 기술이사님께서, 석산 골재 부산물인 찌꺼기 재활용에 관한 연구용역 제안서를 제출하라고 연락이 왔다. 나로서는 기회였다. 연구용역의 성공 여부가 곧 나의 한국행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연구용역비가 있으면 한국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항상 남의 손에 의해 경비가 지출되니, 내가 접대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는데 그 문제가 어느 정도는 융통성이 있을 것 같았다.

둘째,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업가들을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셋째, 관련 학회나 기타 연구기관에서 기술발표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연구제안서를 담당이사님께 발송했다. 발송한 지 2주쯤 지났을 때, 이사님의 답변이 매우 긍정적이었다. 내 연구제안서를 최고 책임자에게 직접 상세히 설명하라는 메시지였다. 말하자면, 아랫선에서는 다 되었으니, 최고 책임자인 회장님과 사장님께 보고하라면서 왕복 비행기 표와 한국 체류비를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일정만 알려주면 될 일이었다.

S레미콘 연구용역 제안

1989년 여름, 나는 연구제안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다. 회장, 부회장, 임원 몇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구제안서에 대해 설명을 했다.

명예회장님은 한국석탄공사 총재를 역임하셨고, 서울공대 교수로도 재직하신 아주 노련한 전문가였다. 그분의 질문도 답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서웠다. 대학교 화공과 출신답게 가끔 질문하셨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짧게 대답했다. 무더위뿐만 아니라 긴장 때문에 땀이 쏟아져서 혼이 났다. 드디어 상세한 설명이 끝났다.

이튿날, 이사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최종결재 받았다는 것이었다. 연구비 역시 줄이지 않았다. 그 당시의 연구비로는 아주 큰 금액이었다. 도로 적용, 내장타일 제조, 시멘트 혼화 재료, 기와와 벽돌, 아스팔트 표층 응용 등 5가지 연구내용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호주에 가서 연구소에 그 내용을 보고했다. 그리고 모든 연구비는 무조건 연구소의 회계를 통해 처리하도록 조치했다. 서울에서의 경비지출을 먼저 집행하고 그 영수증을 연구소에서 관리하되, 처리날짜를 기준으로 원화 대 달러 환율로 계산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연구비를 합법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충분히 쓸 수 있도록 한 셈이었다. 백인들은 그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에 대해 손을 대지 못하도록 방비할 참이었다. 오랜만에 백인들의 텃세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도가 강했다.

프로젝트 수행

나는 연구 계약 차 다시 서울을 찾았다. 이번에는 S 레미콘 회사 직원들이 아주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기술이사님을 비롯한 연구실의 연구원들까지 모두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해 주었다.

드디어 계약이 되었으나, 갑자기 큰 문제가 앞을 막았다. 그 당시 한국의 외국환관리법은, 국내에서 외국으로 연구용역을 발주할 때, 외화반출을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받는 기관은 반드시 국내 대학교나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수행해야만 외화가 반출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 수행자인 내가 어디에든 형식적으로나마 소속이 되어야 했고, 소속된 기관에서 연구비를 집행하는 회계처리를 거쳐 반드시 외환은행에서만 송금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령 내 인건비나 특별한 장비를 구입하는 등의 특수한 목적을 위한 지급은 외화절차를 밟아 송금할 수 있지만, 업무추진 비용 등은 국내에서 소비해야 하므로 외화관리법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연구비 집행과 관리는 S 레미콘에서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정을 알게 되면 오히려 연구용역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는 일종의 위기상황이었다. 몹시 걱정스러웠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나로서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호주에서 연구를 수행하며 경비를 지출해야 하는데 호주로 외화를 보낼 수 없다는 건 큰 문제였다.

또한, 내가 한국의 어느 연구기관에 소속되면 그 기관에서 간접비용은 물론 기타 경비가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문제를 호주 회사 연구소와 의논했고 결국 모든 연구를 한국에서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호주 회사 연구소에서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한국에서의 연구 수행을 포기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식이었다. 호주 회사에서 제품개발 건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굳이 한국의 프로젝트를 해야 하느냐였다. 그러나 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장래 우리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려면 그 프로젝트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나하고 호주회사 간에 타협이 되었다. 프로젝트 수행 기간에는 호주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C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그것만 양보해 주어도 호주 회사 연구소에는 큰 도움이 되었고, 나 또한 한국에서 자유롭게 경비를 지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호주에서 발생한 잔불은 껐고 한국의 어느 연구기관에 내가 소속되어야 하는 큰불이 남았다.

다시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대안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동생은 호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일찍 한국에 귀국하여 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동생은 나보다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고, 마침내 동생이 C 대학교의 L 교수님을 소개해 주었다. L 교수님은 내가 처해있는 문제 해결에 협조적이었고, 일단 C 대학교 소속 전임교수들로 구성된 교내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받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연구용역비는 C 대학교내 연구소에서 관리하되, 간접비를 포함한 L 교수 참여비도 같이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를 알면 문제가 풀린다는 속담을 또 실감한 것이다. 어려울 때마다 이리저리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쉬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부모님과 새벽마다 기도하는 아내, 멀리 미국(장인과 장모님은 아들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가셨음)에서 밤낮없이 기도하시는 장인, 장모님 덕분이라고 믿었다.

연구 주제 중 도로분야는 호주에서 수행하도록 했고, 돌가루는 어디든 같다고 보기에 호주 석산에서의 골재생산 공정으로 시료를 얻어 실험했다. 그 실험 담당자는 내가 호주대학교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도로공학 박사였다. 그 사람은 CMPS라고 하는 아주 큰 엔지니어링 컨설팅회사에서 도로담당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런 용역을 받기 위해 마케팅을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기꺼이 도로 관련 연구를 맡았다.

내가 월급을 받아서 연구용역비를 지출하기로 하고, 그 대신 내 생활비는 기타 경비로 대체했다. 시멘트 혼화 재료 개발은 한국 비산재 시험실에서 진행했다. 내장 타일과 기와류, 벽돌 건설재료 개발은 행남사 연구실 책임자의 양해하에 그곳에서 진행했다. 도로용 아스팔트 필러 재정용은 (주)한국건설품질시험연구소에 의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