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단 C 대학교 교수 기숙사에서 장기간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가 완료되었다. 호주에서 수행 중인 도로 관련 연구는 가끔 호주를 방문할 때 그 진행 정도를 점검키로 했다.
그때가 1990년 이른 봄이었다. 형식적이긴 하나, 한국을 떠난 지 20년 만에 한국의 대학교 캠퍼스에 다시 여정을 풀게 된 것이다. 교수 자격도, 어떤 자격도 아니었지만, 조용한 대학 캠퍼스의 저녁 하늘은 지나온 20년 세월을 회상하며 젖어들기에 충분했다. 내 나이 28세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다가 48세에 잠시나마 다시 한국인이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른 봄이라 저녁에는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끼니는 매일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해서 최소한의 식사도구도 갖추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머무르던 숙소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렸으므로 서울에서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도 일찍 서둘러서 가야 했다. 때로 외롭기도 한 걸 보면 그만큼 정서는 회복되었다는 증거겠지만, 사막에 나 홀로 서 있는 기분도 들었다.
사막에서 작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오아시스를 만나야 하듯, 내가 목표로 하는 사막의 횡단 길에서 이제 어설픈 오아시스 하나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임시 체류는 분명히 그런 오아시스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느낌이 좋았다.
C 대학교에서 임시 사용을 허락한 연구실은 9평 정도였다. 도서관 1층에 있었고, 내 연구실 옆에는 아마 C 대학교에 임시로 머무는 듯한 인사들의 연구실이 즐비했다. 9평 연구실은 대단히 컸으며 호주에서 사용하던 내 사무실 크기의 2배 정도였다.
유리창 뒤쪽에는 봄꽃들과 잡초가 하늘대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보고서 작성도 하고 C 대학교 전화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혜택은 간접비라는 명목으로 가능했기에 심적인 부담은 크게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동선은 느렸다. 일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가려면 정문까지 10여 분 걸어가서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했고, 하루에 한 건 정도의 일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구 계약상의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수시로 시험 진행상황을 확인했는데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가끔 국제전화를 사용하려고 C 대학교 교환한테 부탁하기도 하고 전화요금은 별도로 지불했다.
고국에서 활동할 수 있느냐는 기로에서
도로 연구 역시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나는 중간 보고서를 작성하여 S 레미콘 회사에 제출했으며, 회사 측에서는 실험결과에 대해 만족해했고, 드디어 계약대로 모든 연구결과를 제출할 수 있었다. 연구 성격상 어떤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기술에 응용하는 정도여서 연구 자체는 어려운 일이 없었다. 최종보고서를 제출하고 다시 호주에 영구 귀국하느냐, 아니면 한국에 남을 수 있느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호주에 귀국해도, 행남사 기술고문 자격으로나 S 레미콘 회사가 그 무렵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사업화하게 되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S 레미콘 회사가 그 연구결과를 가지고 당장 사업화하는 것은 그리 전망이 밝지는 않았다. 나는 열심히 여러 사람들과 접촉했다. 비록 비산재 정제시설이 성공적으로 완료 되었어도, 비산재 회사가 한국에 있는 나를 수용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1991년 가을 무렵,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부터 독립하고 한국교통연구원에 근무하던 신부용 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C 대학교에서 환경공학과를 신설하며 교수 임용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환경이 미래공학’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져 있어, 여러 대학교에서 환경공학과를 신설 중이거나 이미 신설하여 가끔 교수 임용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신문광고는 이미 다 정해놓은 상태에서 형식적인 절차만 밟는 수단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다. 전화로 문의해 봐도 대답은 역시 사무적이었다. 그러던 차에 신부용 박사가 정보를 준 것이다.
C 대학교에서 찾고 있는 교수는 폐기물 자원화 전공자였다. 환경공학에서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개념이지, 자원화 쪽 전공자는 그 특성상 배출할 수가 없다. 폐기물 자원화는 자원공학이나 재료공학 중에서도 토목재료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분야다. 전공으로 보건대, 나도 적임 후보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신부용 박사로부터 C대학 H교수를 소개받아
신부용 박사는 C 대학교 H 교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신부용 박사와 H 교수는 도시 교통 분야에서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신부용 박사가 H 교수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미리 못을 박았다. 여기까지 알려준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더없이 고마웠고 도움이 되었다.
신부용 박사는 C 대학교 H 교수님께 나를 소개했다. 나는 바로 H 교수님께 연락했고, H 교수님은 일단 나를 본인의 연구실에서 만나보자고 하시며 약속시각을 정해주셨다. H 교수님께서는 참으로 예리하게 말씀하셨고 성격도 분명해 보였다.
H 교수님은 도시계획 분야의 대가로 알려진 분이었다. H 교수님께서는 환경공학과의 신설 및 교수임용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학과 신입생 모집은 1992년 봄에 있었으나 신임교수 임용 결정은 다음에 하시겠다며, 1992년 봄학기에 나를 강사자격으로 강의를 의뢰하시겠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한 학기 동안 내 강의를 평가해 보시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즉시 환경공학과의 폐기물처리 전공자들을 위한 강의준비에 착수했다. 불과 2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어서 마음이 바빴다. 더구나 내가 기거할 할 방도 준비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헤쳐 나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다 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일단 강의할 기회를 얻고 준비에 착수
그 무렵이 한국에서 진행해온 S 레미콘 프로젝트가 종료된 때여서 C 대학교 연구실은 더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강의준비 할 장소와 숙소를 마련해야 했다. 우선 한국의 비산재 회사 박 사장님께 강의준비를 위한 사무실 공간을 부탁했다. 박 사장님은 기꺼이 한남동 사무소 공간을 배려해주셨고, 나는 곧 강의준비에 들어갔다.
다음은 숙소를 마련해야 할 처지였다. 수소문 끝에 과천종합청사 앞에 있는 7평형 싱글용 아파트를 구했다. 혼자 자취할 수 있게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쯤 되면 호주에 다시 영구 귀국하는 것은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파트는 아주 저렴한 전세금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살림도구를 좀 장만하고 밥상을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강의준비에 몰두했다.
물론, 한남동 박 사장님 사무실은 내 연락망으로 그대로 유지했다. 나는 C 대학교에서 자주 H 교수님을 뵙고, H 교수님의 계획과 환경산업 분야의 전망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이 개발시기였다면 앞으로는 환경시대가 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공기, 물, 폐기물 자원화와 관련된 환경공학은 우리나라의 미래 전략산업이 될 것이라고도 하셨다. 특히, H 교수님은 폐기물을 재활용할 수 있는 폐기물 자원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H 교수님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녹색환경 정책이 바로 그분께서 미리 예견하신 대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