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담임목사가 없어서 교인들의 불평도 있었고, 한편 경쟁 관계로 볼 수 있는 한인 연합교회에는 한인 목사가 있어서 비교적 우리가 열세에 놓인 처지였다. 위의 두 가지 이유로 우리 교회 목사 청빙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H 목사로 결정했음을 호주 장로교단과 임시 담임목사에게 알렸다. 나는 H 목사 초청을 서둘렀다. 우리 교회가 호주 장로교단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행정 절차를 따라야 했다.
먼저 얼우드-버우드(Earwood-Burwood) 노회에서 H 목사 건을 승인해주어야 했다. 노회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렸다. 우리 교회 목사 청빙 안건이 밀려있으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일단 노회에서 청빙을 승인하면 총회 본부에서 캔버라 이민성에 이민 수속 서류를 접수하고 공식적인 이민 초청이 진행된다. 나는 수차례 회의에 참석하고 관련 서류들을 본부에 접수하면서 이 사실을 부산의 H 목사에게도 전했다.
그런데 이민 수속 중 교회 내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H 목사가 우리 교회의 시무가 될 경우, 그분의 연봉 문제였다. 일반 직장인들의 연봉은 ‘Annual salary’라고 표현하지만, 목회자들의 연봉은 ‘Annual Stipend’라는 단어를 쓴다. 목회자들에게는 곧 연간 사례금에 해당하는 것이다. 연간 사례금은 국가가 아닌 교단에서 매년 조정하여 발표했다.
문제는, H 목사에게도 호주의 연간 사례금 제도를 적용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교회 자체에서 월급을 정하고, 식량도 제공하고, 사택도 정해주니까, H 목사에게도 한국식을 적용하자는 의견과 호주 교단 소속이니까 호주 목사 기준으로 지급하자는 의견으로 나누어졌다.
H 목사를 도와 교회 일에 최선을 다해
호주에서 한국식을 적용하자는 의견은 상식 밖의 제안이었다. 나는 호주 장로교단의 규정에 따라 자녀 교육비 등 사례금을 지출하자고 했다. 그 문제가 결정되지 않으면 이민 초청 서류를 완성할 수가 없었다. 호주식으로 하기로 결정된 상황에서도 일부에서는 한국식을 고집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식 급여를 적용하여 H 목사 초청 서류준비 완료 및 총회장의 마지막 서한을 호주 이민성에 제출하고 승인을 기다렸다. H 목사가 언제부터 한인 장로교회 시무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다리던 끝에 H 목사 가족이 호주에 도착했다. 목사 사택이 교회 옆에 있어서 교인들은 수시로 목사와의 대화가 가능했다. H 목사는 열심히 했고, 일요일 설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과거에 임시 담임목사였던 클레멘츠 목사와는 소통될 리 없었다. 영어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우선으로 H 목사를 도와 교회 행정 일을 했다. 소속 노회 참석, 호주 목사들과 연결하는 역할, 불법체류자들의 영주권에 대한 불안감, 호주 장로교단으로 연락하는 일 등이 내 주요 임무였다. 교회는 안정되어 갔고, 교인 수도 점점 많아졌으며 재정도 아주 튼튼해졌다. 이제는 호주 목사 설교 통역을 하지 않아도 되니 더 여유가 생겼다.
현진이는 6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네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도 데리고 오기도 했다. 바로 옆집에 사는 또래 친구 토드(Todd)와 근처에 사는 다른 아이들 한두 명과 그 넓은 쿨테섹 마당에서 놀며 활발하게 지냈다.
부모님은 가끔 “현진이 혼자서는 외국에서 너무 외로우니 아이가 한 명은 더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늘 같은 생각은 했지만, 아이를 더 키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현진이 혼자 외국에서 살 생각을 하면 부모님 말씀이 옳았다. 마음을 바꿔먹고 현진이 동생을 낳기로 했다.
어느새, 1977년 2월 졸업식을 알리는 안내장이 학교에서 왔다. 내가 드디어 외국의 대학교에서 석사학위 가운을 입고 졸업식장에 입장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대견스럽고, 부모님과 아내의 고생도 인정했다.
그러나 정작 가까운 교인들은 그들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내 석사학위 취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해 이상할 정도였다. 일종의 질투심으로 보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의 속담이 생각났다. 나로서는 피눈물 나게 노력한 결과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그렇게 드러내는 게 부담스럽다는 뜻일까? 내색하는 건 아니지만, 맨주먹으로 덤빈 결과라는 사실에 대해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던 것이다.
졸업식 날, 사각모에 독특한 후드를 두르고 나는 학위 졸업장을 받았다. 우리나라처럼 강단에 몇백 명 모아놓고 몇 사람의 연설로 끝내는 졸업식이 아니었다. 부총장이 학생들을 한 명씩 호명하여 단상으로 올라오게 하고, 총장은 사각모에서 흔들리는 노란색 끈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며 졸업장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Work Hard(수고했어요)!’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학위수여
무작정 비행기 타고 부자 나라에 간 지 6년 반 만에 외국 대학교 총장님으로부터 학위를 수여하였다는 자체가, 그 가치를 떠나 나로서는 말할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설사 석사학위가 쓸모없어진다 해도 애당초 호주에 이민 갈 때, 가능한 공부를 더 해서 결국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던 최소한의 목표는 이룬 것이다. 그 감회를 누가 나만큼 느끼겠는가!
장터처럼 소란스럽게 꽃장수들이 아우성치는 한국의 대학교 졸업식과는 전혀 달랐다. 역시 선진국임을 실감했다. 조용히 흐르는 오르간 소리에 총장님을 위시한 대학 관계자들이 차례로 입석하는 모습도 본받을 만했고, 박사·석사·학사 순서로 조용히 자리에 앉는 모습도 질서정연했다. 졸업식장에서의 친척들 축하도 금했고, 학교에서 지정한 사진사 외에는 식장 내에서 촬영을 금하는 것도 보기 좋았다.
잔잔한 물결처럼 시종 가슴속에 스며드는 오르간 소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대학 전체학과가 같은 날 한꺼번에 졸업식을 하는 게 아니라, 단과대학별로 하니까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 장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도 졸업식은 그렇게 잘 끝났다.
그로부터 약 1년 전에 장인과 장모가 호주를 다녀가시면서 크게 실망하셨다. 한국에서 생각한 것처럼 부자 나라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을 직접 확인하셨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벌어 한 사람 몫은 은행융자 갚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그저 먹고 사는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한 사람이 일을 멈추면 전체 생활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나만 그렇게 생활한 걸까? 그건 아니었다. 호주 교민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장인, 장모께서는 호주 이민에 대해 재검토해 봐야겠다며 귀국하셨다(몇 년 후 미국으로 이민 가심). 나는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이중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과정으로 보내던 토요일을 활용하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