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토는 우선 결합력을 가진 흙이다. 결합력이 없으면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 결합력은 입자의 크기와 물 분자와의 상호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뉴질랜드 카오린을 백토(白土)라고 부른다. 결합력도 있고 소성(Firing)하면 흰색에 가까워서 세계적인 점토류에 속한다. 자연에서 생산되는 점토류인 카오린의 점력이 높고, 구웠을 때 흰색에 가까운 것은 대단히 희귀한 경우이다. 이는 작은 입자의 크기와 철분(Fe) 함량이 낮아야만 가능한데, 우리나라에서는 하동지역에 있는 백토가 그런 성질에 가깝지만, 지금은 고갈되어버린 상태이다.
시드니로 돌아와 다시 논문 준비
나는 두 번째 행남사 방문에서 정말 행남사 기술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년에 한두 번 행남사를 방문하여 기술자 교육과 제품개발에 힘써달라는 취지였다. 덕분에 나는 고정적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고향을 찾아볼 기회도 얻은 것이다. 한편, 내가 박사학위를 마칠 경우에 한국으로 귀국할 수도 있는 길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한국 방문의 과제를 웬만큼 성공적으로 끝내고 소굴 같은 시드니로 돌아갔다.
다시 논문 제출 준비를 해야 했다. 이제 교수님께서 만족할 만한 논문을 써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에 가득했다. 행남사 담당 박 이사님은 수시로 연락을 해주셨다. 행남사와 뉴질랜드 회사 간에 직거래가 성사되었다는 소식이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덕분에 일본상인들을 배제할 수 있었고, 막대한 원료 수입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김 회장님께서는 내 수고를 잊지 않겠다고 친필 편지도 보내주셨다.
그런데 논문 제출에 매진하던 중에도 한인 장로교회는 점점 증오와 갈등이 심해졌다. Y 목사의 제안대로 두 교회가 무조건 합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호주 장로교단의 교법에 따라 장로교단 소속에서 분리하려면 전체 교인 2/3 이상이 동의해줘야 한다고 했다. Y 목사를 부추기는 그룹에서야 동의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2/3 동의를 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목회자였다.
교회는 계속적인 반목과 갈등
그렇듯 불필요한 교회의 시련은 계속되었고, 교인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교회 목사가 중간에서 휘젓고 다니는 데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기저기 소문이 퍼지고 사실이냐고 확인하는 등 사태가 점점 심각해졌다. 교인들 간에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참으로 불행한 한국 동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나도 더 버틸 힘을 잃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논문을 완성했다. 500페이지가량의 상당한 두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짓을 불려서 더 그랬다. 논문의 두께가 늘어나는 이유는 대체로 내용을 줄여서는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설명을 자꾸 덧붙이다가 저절로 양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력 있는 사람의 논문일수록 간단명료하지 않은가. 논문 초안을 교수님께 제출했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읽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다, 논문답게 수정까지 해야 하니 교수님께서는 한심해하시는 듯했다. 그렇게 바쁘신 교수님께서 언제 논문을 봐주실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가 1981년 3월경이었다. 교수님께서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수정 지시를 내렸다. 나는 교수님 연구실을 노크할 때마다 가슴이 덜컹대며 긴장되었다. 혹시 전부다 수정하라고 던져버리시지는 않을까? 논문을 제출해본 사람이라면 그 긴장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의 박사학위 논문 초고(Draft)가 탄생했다. 이제 교수님께서 마지막 완성본을 제작하라고 하시면 심사위원회에 올리는 절차가 남았다. 교수님의 최종심사본이 나온 게 1981년 6월경이었다. 내가 논문을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감개무량했다. 하나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셨다는 것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뒷받침해주셨다는…. 거의 투쟁적으로 덤빈 박사 논문을 제출한 후의 그 공허감이란!
논문 초고를 작성하고 가족과 한국행
어렵게 목표를 달성한 뒤에 오는 그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엉뚱한 일을 저질러 버리는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로, 식구들을 데리고 목포 행남사 방문차 기술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부모님께서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하셨지만 그럴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행남사에서 경비를 지원할 예정이라 쉽게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떠난 지 11년 만에 나 혼자에서 4명으로 늘어난 가족이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다. 어찌 보면, 목표의 절반은 이룬 셈이었다. 그나마 박사 논문이 통과되어야 절반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이고 앞으로 갈 길도 멀었다. 그러나 행남사의 경비지원으로 우리 가족이 비행기에 올랐던 그 순간만큼은 과거의 모든 일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순간순간 가슴이 뛰는 가운데 비행기는 시드니 하늘을 서서히 떠올랐다.
한국에 머무는 기간은 약 10일 정도였다. 현진이는 11살 소년, 명진이는 4살 유아원생이었다. 이제 내 나이도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가 되어도 걱정이었다. 어디서 나를 받아줄지 자꾸 의심이 생겼다. 잊고 즐겁게 지내보려 노력해도 앞으로의 취업이 걱정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에 도착했다. 장인과 장모님께서는 손자와 손녀를 몹시 보고 싶어하셨지만, 일정상 나중에 뵙기로 하고 목포행 기차를 탔다. 물론, 공항에는 행남사 직원이 마중 나와서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도록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목포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했고 여름이었던 것 같다. 박 이사님께서 마중 나오셨고, 그날은 호텔에서 묵었다. 이튿날 회장님을 뵈러 회사에 가니, 그 육중한 몸집의 회장님이 현관까지 나오셔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그동안 뉴질랜드 카오린 문제를 해결한 것에 대해 한껏 칭찬하시고 고마워하셨다. 어떻게 보면 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여기에 올 기회를 부여받은 것인데, 왠지 쑥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회장님은 박 이사님께 우리가 목포에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알아서 잘 챙겨드리라고 특별지시를 내리셨다. 박 이사님께서는 우리가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함께 다니시며 매사 점검하셨다. 김 사장님께서도 수시로 우리 일정을 확인하셨다. 정말이지, 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짜릿한 시간이었다. 행남사 기술진 중 대부분이 나와 같은 대학교 후배들이었는데, 그들은 마치 나를 개선장군이라도 되어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대했다. 그들이 친절하게 선배 대접해준 고마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향과 가족들의 환영
그들은 나를 보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골 목포에서 큰 뜻을 품지 못하고 도자기 공장에서 보내려 한 그들의 의식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준 셈이다. 기술진 중의 한 사람은 그 무렵에 공부를 시작하여 결국 지방대학의 교수로 취업이 되었다. 그는 항상 나한테 그런 동기를 유발해준 것을 고마워했다.
우리 가족은 목포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외손자와 외손녀를 보신 장인, 장모님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셨다. 한편, 딸이 고생하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친척들도 모두 내가 큰 출세라도 하고 온 것처럼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잠깐이나마 가족을 데리고 그렇게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지난 11년 동안 길고 긴 터널 속을 헤맸으며 아직도 다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인데도, 벗어난 걸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정말 완전히 그 터널을 빠져나왔다면, 어찌 장인·장모님께 용돈을 많이 드릴 수 없겠는가. 선물이라야 겨우 호주에서 생산되는 몇 달러짜리 로열젤리 정도가 전부였으니….
아직도 지나가야 할 터널이 많이 남아있었다. 내 형제들을 만나면 역시 그들의 관심은 부모님 안부였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우리는 호주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싣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드니에 돌아왔다.
또 지긋지긋한 교회의 분쟁에 시달리러 온 것이다. Y 목사의 독립교회 건으로 교인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Y 목사의 사명이 그런 거라면 한인교회에 남아있는 한은 똑같은 고통을 피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