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운동을 별로 안 하지만 축구는 그런대로 흥미가 있었다. 우리 공병단에는 4개의 대대와 기타 배속부대 대항 축구대회가 열리는 연중행사가 있었다. 우리 대대장은 중령으로 갓 진급하여 부임한 젊고 패기 넘치는 새내기 장교였다. 키가 훤칠하고 체격도 좋았으며, 육군대학 졸업 후 바로 우리 부대장으로 부임하였는데, 다른 부대와의 경쟁에서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우리 부대도 축구팀을 조직했다. 내가 그 축구팀의 주장이 되었는데 내 위치는 센터하프였다. 내 방어선이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리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다. 장교는 나 혼자였고 중사, 하사,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우리 팀은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다. 무더운 한낮의 축구 연습이란 재미도 있지만, 생지옥이기도 했다. 축구대회 직전이라 팀 전체가 맹연습을 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더워 잠깐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대대장이 들이닥쳤다. 열심히 뛰고 또 뛰며 연습을 강행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던 축구팀이 나무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으니, 그 대대장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도 남지 않겠는가? 팀 앞으로 다가오는 대대장의 지프 앞에 서서 내가 그에게 보고했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 잠깐 그늘에서 쉬는 중입니다!” 신고하자마자 번개처럼 날아온 주먹이 내 아랫배를 ‘팍’ 치는 게 아닌가?
“이 새끼! 연습하라니까 놀아? 팀 전부 불러!”
할 수 없이 나는 전원 집합시켰다. 잔뜩 화가 난 대대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전부 엎드려뻗쳐!” 어디서 나왔는지 공병대 곡괭이 자루가 등장했다(통상 지프 옆에는 곡괭이와 삽이 준비되어 있음). 그날, 팀 전원이 곡괭이 자루로 몇 대씩 얻어맞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게 느껴진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더운 날씨에 연습하다가 잠깐 쉬었다는 이유로 그처럼 사병들 앞에서 욕설과 몽둥이질을 한 것은 나로서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대를 6개월 정도 남겨둔 어느 날, 대대장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르더니 군수과 보좌관으로 전속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과 즐기던 회식의 재미가 그때부터 모두 사라졌다. 그래도 작업 소대장에서 본부 군수과 보좌관으로 옮겨준 걸 보면 대대장이 나를 좋게 봐준 것 같긴 했다.
군수과 보좌관의 임무는 덤프트럭 약 10~20대를 끌고 다니며 보급창으로부터 물품을 받아 부대로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목재, 시멘트, 유류 같은 굵직굵직한 군수물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운전병들의 안전사고와 음주, 받은 물품들이 부대로 잘 운반되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물품 수령 과정에서 또 하나의 일화가 있었다. 시멘트를 받기 위해, 덤프트럭 20여 대를 끌고 양수리 보급창고로 이동했다. 양수리에 있던 보급창고에는 내가 인솔해간 20여 대의 덤프트럭만 대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 부대에서도 물품을 받기 위해 수많은 덤프트럭이 몰려들었다.
보급부대 위병들은 그 덤프트럭들을 항상 정리해야 했다. 내가 시멘트 수령 차 보급 창고부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 부대의 덤프트럭들이 엄청나게 밀려 있었다. 그대로 기다리다가는 밤늦게 받거나 빈 트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빈 트럭으로 되돌아갈 경우 군수과장(함경북도 북청 출신)의 모습이 어떠할지도 떠올랐다.
어떻게든 그날 시멘트를 받아야만 해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가 탄 덤프트럭을 앞으로 살살 기어가게 했다. 내 트럭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창고부대 보급장교가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더 가까이 가서 부대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방 장교의 얼굴과 이름표를 식별할 정도의 거리에 바싹 다가갔을 때 보급장교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보급장교의 계급은 중위였다. 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으므로 상관이 불렀다는 사실이 좀 이상했다. 마음속으로, 질서를 지키지 않고 틈새로 다가오는 내 행동을 보급장교가 어떻게 제재할지 염려되었다. 나는 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 그 보급장교 앞으로 다가섰다. 야단을 치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야! 나 몰라? 나 학전이야!”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내게 중위 계급장을 단 보급장교가 하급장교에게 “야!” 하고 반말을 했을 때, 순간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이름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던 것이다.
“네, 사실은 ○○○대대에서 왔습니다. 우리 부대 보급 상황이 너무 급해서 물품지급 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보급 장교가 다시 큰소리로,
“야, 나 학전이다!” 그제야 상대의 이름표를 보니, 아! 낯익은 이름이 아닌가?
“야! 너, 이 학전이냐?”라고 내가 되물으니 “그래, 인마. 나 학전이야!” 그는 더 크게 대답했다. 바로 이웃동네에 살았던 옛 친구를 고등학교 졸업 후 6년여 만에 거기서 만날 줄이야(이 친구는 지금도 만나고 있음)! 우리는 긴 악수를 했다.
그 친구는 간부 후보 출신으로 일찍 임관을 했다. 그의 계급이 나보다는 높았기 때문에 그를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고, 더구나 푸른 제복을 입은 그의 어른스러운 모습은 어렸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주차 질서를 지키지 않고 앞으로 슬슬 덤프트럭을 몰아간 내 행위에 나 스스로가 지레 겁을 먹고 있던 터라, 그 친구를 쉽사리 못 알아본 이유도 있었다. 그 친구는 내 얼굴이 어릴 적 모습과 많이 달라지지 않아서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뜻밖에도 반갑게 만난 그 친구가 만사 제쳐놓고 내 물품 수령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나는 큰 어려움 없이 그날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렇듯 바쁘고 재미있는 나날들이 바람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이듬해(1967. 2.) 나는 제대를 했고, 그 무렵에 우리 집은 목포에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신도시라는 허허벌판으로 이사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