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과 유년기_3 (9화)
  제1장 덕실골과 유년기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을 실시했다. 최초 이 작전을 계획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왜냐하면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얕을 뿐만 아니라 갯벌로 되어 있어 상륙정을 접안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상륙작전 지역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그 이유가 내가 인천에서 상륙을 하는 이유이다. 적도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허술하게 해안방어를 할 것이기 때문에 기습적인 상륙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맥아더 장군의 주장대로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허리가 절단되어 보급선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낙동강 선에서 북으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은 인천에서 상륙한 부대와 협동하여 적을 완전 포위섬멸 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북한군은 전멸이 되었고, 북으로 도망을 하지 못했던 북한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공비가 되어 휴전이 될 때까지 후방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38선에 도착하여 북진을 계속할 것인가에 대하여 한국군과 유엔군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다. 한국은 계속 진격을 하여 이 기회에 국토를 통일하려고 했고, 미국과 유엔은 중국이 개입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38선 이북으로 공격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반된 의견이 대립되고 있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으로 공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속초지역에 있던 한국군 제3사단이 1950년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하여 북쪽으로 공격했다. 일방적으로 38선을 넘어 북으로 공격하니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낙동강선에서 대부분의 병력이 손실된 상태라 한국군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국군이 북으로 공격해 들어가니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군은 38선을 돌파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38선을 돌파한 아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20일에는 평양을 점령했고, 10월 25일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유엔군은 평양 북방 숙천 지역에 대규모 낙하산부대를 투하하여 평양을 포위한 후 김일성을 생포하려고 했지만 김일성은 이미 강계지역으로 도망하고 평양은 텅 빈 상태였다.
 
압록강까지 도달했던 아군은 1950년 10월 26일 예상치 못한 중국군을 압록강변에서 만나게 되었다. 30만의 중국군은 유엔군의 공중정찰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행군을 하여 북한지역으로 들어왔다. 중국군의 개입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던 유엔군은 갑자기 나타난 중국군의 인해전술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방망이 수류탄만 들고 공격해 오는 수많은 중국군을 아무리 총을 쏘아도 죽은 시체를 넘어 계속 공격을 해 왔다. 결국 유엔군은 인해전술에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여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를 1․4후퇴라고 불렀다.


▲ 평양에 진군, 점령하고 있는 유엔군

유엔군이 후퇴를 할 때 개마고원까지 진격을 했던 미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쪽으로 철수를 하여 흥남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철수를 했다.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미 해병 제1사단이 흥남까지 나와 해군함정을 타려고 하는데 피난민들이 몰려나와 배를 같이 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결국 피난민 10만을 배에 태우고 함께 철수를 했는데 이때 장면을 묘사한 “굿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는 오랫동안 히트곡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기도 했다.

이 당시 덕실골은 학교 등 대부분의 공공건물은 모두 폭격으로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에 칠판을 걸고 가마니를 땅에 깔아놓고 공부를 했다. 수업이 끝나면 잿더미가 된 학교 바닥에서 탄피와 못 등을 주었다. 당시에는 고철을 수집해서 정부에 바치라는 지시가 학교마다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부터 옷과 우유 등의 구호물자가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배급되었다. 미국사람들이 입던 옷이라 상의가 오바같이 크기도 했으며, 신발이 큰 배와 같아서 걸을 때 질질 끌면서 다니기도 했다. 우유가루가 큰 드럼통에 담겨져 나왔는데 우유가루를 입에 넣고 물을 마시다가 목이 막혀 병원으로 실려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때 남자들은 군에 들어갈 때 방아쇠만 당기는 연습만 하고 전투에 투입되니, 갓 입대한 신병들은 파리목숨 같은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우리 동네 남자들은 군입대 표시를 한 어깨띠를 두르고, 동네 밖에까지 나온 마을사람들의 농악환송을 받으면서 집을 떠났다. 옆집 아낙네들은 담 너머로 남편과 자식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장면을 묘사한 “아내의 길”이라는 백설희의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1951년 3월에는 아군이 다시 38선을 회복하면서 지루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38선에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맥아더 장군은 만주지역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북진통일을 하자고 주장했다.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거부한 미국의 정책에 따라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은 해임이 되고,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미국은 대통령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빨리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확전을 하려고 하는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마침 소련 말리크(Yakov Aleksandrovich Malik) 유엔대표가 유엔에서 연설을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게 되자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공산군 측이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하자고 고집을 하는 바람에 당시 북한군이 통제하고 있던 개성에서 최초의 휴전회담이 개최되었다. 공산군 측이 개성을 고집한 이유는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개성은 38선 이남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유엔군의 힘이 공산군보다 강했기 때문에 개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개성에서 회담을 하자고 했던 것이다. 회담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포로교환문제로 회담이 지연되다가 1953년 3월 5일 한국전쟁에 대한 강경정책을 펴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L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양측은 먼저 부상포로부터 교환을 한 후 이어서 1953년 7월 27일 10:00시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은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 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국군 90만 명이 전사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격언을 상기하면서 전쟁예방을 위하여 국가안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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