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년 우등, 개근한 덕곡초등학교 (10화)
  제1장 덕실골과 유년기

전선이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 기간에 나는 덕곡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덕곡초등학교는 1926년 9월 25일 덕곡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이 되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학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형들로부터 미리 익힌 한글과 산수공부를 바탕으로 다른 학생들 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입학을 하자마자 교과서를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니 학생들과 선생들 간에 나의 공부실력에 대하여 소문이 났다.

한번은 4학년 담임인 차기분 선생이 나를 불러 자기 교실에서 전체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4학년 국어책을 읽으라고 했다. 물론 자기반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하여 코흘리개 1학년학생인 나를 교단에 올려놓고 책을 읽으라고 했지만 선배들 앞에서 책을 읽게 되어 송구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1학년 학생이 4학년 국어책을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니까 선배들이 깜짝 놀랄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여성에 대한 교육은 보수적이었다. 한국전쟁기간 중이라 여자 아이들이 제때에 학교에 들어가기가 더욱 쉽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반에도 교육시기를 놓친 여자아이들이 늦게 입학을 했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나이가 남학생보다 2~3살 정도 많았다. 김명선, 나명자, 나숙이, 박정애, 서기분 등은 키도 크고 누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시집을 보내도 될 정도로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갑연, 박옥선 정도만 우리와 같은 또래였고 나머지는 모두 남학생들을 동생으로 취급할 정도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까이 하기엔 거리가 먼 이방인과 같은 동급생이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 비해 나이나 신체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니 나이가 비슷하고 말이 통하는 우리들끼리만 노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친한 친구인 차종형, 이한출, 임쌍효, 정수진, 구상회, 구자선, 정은목, 최동길, 최장석, 강신찬, 김복기, 김정열, 노영훈, 서재천, 서재홍, 성동한 등은 학교 공부가 끝나면 서로의 집을 드나들면서 밥도 함께 먹고 잠도 같이 자면서 가까운 우정을 쌓았다.

부모들은 친구들이 집에 오면 친자식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우를 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부모가 내 부모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함께 어울려 놀 때에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밤을 새울 때도 많았다. 밤늦게까지 놀다가 학교에 지각을 하여 단체기합을 받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점심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가는데 도시락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이미 다 없어졌다. 첫 교시가 끝나면 1/3, 둘째 교시가 끝나면 1/3, 셋째 교시가 끝나면 또 1/3 이렇게 하여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도시락은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이 도시락을 먹은 사람은 손을 들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벌을 서게 했다. 그래도 공부하는 것보다 도시락 먹는 즐거움이 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덕곡초등학교 죽마고우들(둘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모자 쓴 사람이 필자)

겨울에는 난로에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산에 가서 썩은 나무 밑둥치와 솔잎 갈비를 수집해서 불을 피웠다. 남학생들이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는 동안 여학생들은 청소를 하면서 남학생들이 나무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학생들은 나무를 수집하다가 깊은 산속에 나타난 토끼몰이에 빠져 해가 저무는 줄을 몰랐다. 이럴 때면 교장선생이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들에게 화가 무척 난 얼굴로 단체기합을 주기도 했다.

전쟁 중에 교실은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교내에 있는 플라타너스나무 아래서 칠판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아놓은 상태에서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했다.

“맴 맴 맴……”

매미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나무그늘 아래에서 구구단을 외우고, 비가 올 때는 창고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그래도 공부를 하겠다는 향학열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도시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보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은 수준이었다.

부산에서 공부를 하다가 덕곡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정화자라는 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큰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세련되고 옷도 잘 입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3번이나 출마를 할 정도로 가정형편도 좋았고 가문도 훌륭했다. 뽀얀 얼굴에 세련된 자태를 한 정화자에 대한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서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남자아이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햇볕에 거슬러 얼굴이 까만 우리들 시골아이들과는 어디를 보나 차이가 났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데는 우리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부산에서 공부를 잘 했다고 하지만 우리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에 우리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 선의의 경쟁상대가 되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가 만발한 학교 교정에서 가을운동회가 열렸다. 산에 있는 청솔가지를 꺾어서 교문에 개선문을 만들고,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휘날리었다. 각 마을에서 모여든 풍물패들이 자기들의 장기를 자랑했다. 이날은 학생들과 학부형 그리고 마을주민들을 포함해서 수천 명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하나의 축제와 같은 잔치분위기가 되었다.

우리들은 이러한 가을운동회를 며칠 전부터 가슴 설레며 손꼽아 기다렸다. 그동안에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부모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각종 장기자랑을 여러 날 동안 연습했다. 당일 날에는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부모와 함께 발 묶고 달리기, 큰 공 굴리기, 100미터 달리기, 릴레이 등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내었다. 운동회 날에는 어머니가 특별히 김밥에다가 고구마, 밤을 삶아서 싸주었다. 나무그늘에서 도시락에 국밥을 곁들여 먹는 맛이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6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통영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덕곡에서 통영 한산도까지 수학여행을 한다는 것은 보통 생각으로는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장거리 수학여행을 떠났다. 당시에는 버스가 귀했다. 트럭을 대절해서 10시간이나 걸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남녀학생들이 먼지를 보얗게 덮어쓰고 트럭이 덜커덩거릴 때마다 우리는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했지만 그것이 더욱 재미있었다.

덕곡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6년간 우등 개근을 하였고 전체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최고의 영예인 경상남도 교육감상을 탔던 것이다. 반장도 매년 했는데 3학년 때 한번 나와 라이벌이던 하남식에게 빼앗기고 내가 계속했다. 6학년 때는 전교생 회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남식은 그 후에도 죽마고우로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상의를 하는 사이였으며 그가 간암으로 일산 암센터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의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덕실골에서 대구로 나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대부분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가정형편이 조금 낫다고 하는 학생은 가까운 옥야중학교나 합천중학교에 다녔다. 이런 환경 하에서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겠다는 부모의 열성과 나의 향학열에 따라 대구로 나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에는 연고가 아무도 없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대구로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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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실골에서 대구로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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