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빙고 베트남어 교육대 (27화)

보병 제2사단 제17연대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치고 연대 작전과 교육장교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대장은 발로서 부대를 지휘하면 되지만 참모는 머리로 창의적인 기획능력을 보여주어야 하는 보직이다. 작전과 교육장교로 보직을 받고 보니 전언통신문 하나도 작성할 줄 몰랐다.

작전과장의 지침을 받으면서 착실하게 업무를 배워나갔다.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밤을 새우면서까지 최선을 다했다. 빠른 속도로 업무를 파악하는 나를 연대장과 참모들이 지켜보면서 유능한 장교로 인정했다.

작전과 교육장교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공수훈련을 받을 희망자를 모집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당시에는 사관학교 생도 때 공수훈련을 받지 못하고 임관을 했다. 군인으로서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리는 공수훈련을 꼭 한번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지원서를 내고 원주에 위치한 제1군사령부에서 체력검정을 받은 후 특전사령부 공수교육대로 가려고 하는데 월남으로 가라는 육군본부명령이 내려왔다.

월남전쟁이 치열한 시기라 초급장교들이 전투에서 많이 필요한 때였다. 초급장교로서 월남에 가게 되면 모두 죽는 줄 알았다. 실제로 많은 사상자가 월남에서 한국으로 비행기에 실려오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는 말이 “배로 가서 배로 와야지 배로 갔다가 비행기로 오지 말라”고 했다. 대부분의 파월병력은 배로서 수송되고 비행기로는 전사자나 부상자를 싣고 오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은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든 당사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육군본부에서 일방적으로 파월명령이 내려왔다. 군인은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에 대하여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23기로 졸업한 177명의 동기생 중에 육사교관으로 파견된 장교를 제외하고 144명이 월남전에 참전을 했다.

23기 월남파병 현황

내가 월남으로 가기 위해서 육군본부로 가니 인사운영 장교가 나에게 서울 동빙고에 있는 베트남어 교육대에 입교하라고 했다. 동빙고에는 정보학교 어학교육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베트남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베트남어 교육대에는 베트남 원어민들이 교관으로 베트남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월남여자와 한국남자 사이에 태어난 조옥숙이라는 선생이 있었다. 조옥숙은 월남에서 태어나 월남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미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그녀의 고모가 서울에 살고 있었고, 조만용이라는 남동생도 누나를 따라 서울에 와서 고모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의 베트남어 실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우수했기 때문에 휴일이면 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말이 되면 아직 미혼인 조옥숙과 그녀의 남동생 조만용을 데리고 민속촌과 고궁을 답사하면서 한국문화와 역사를 가르쳐주고 서울 시내를 다니면서 생활베트남어를 숙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 조만용과 수영장 등에서 생활베트남어를 익히는 필자

정보학교 어학교육대 옆 보광동 42번 버스 종점 부근에서 하숙을 하면서 베트남어 교육대에 다녔다. 하숙집에서 교육대까지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한번은 책가방을 끼고 단어를 외우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군용 지프차 한대가 내 앞에 끼익하면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지프차 앞 범퍼에는 5160부대 1호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차 안에는 진한 선글라스를 낀 대령이 타고 있었다.

“그 장교 어디로 가는가?”
“네! 정보학교 베트남어 교육대까지 갑니다.”
“그러면 타!”
“이름이 뭐야?”
“차기문 소위입니다.”
“고향이 어디야?”
“합천입니다.”

그 대령은 나를 베트남어 교육대 정문 앞에 내려주면서 주말에 갈 때 없으면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하면서 집까지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5160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0단이었으며, 지프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합천 같은 동향 사람이면서 훗날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된 전두환 대령이었다.

전두환 대령의 집은 나의 보광동 하숙집에서 가까이 있었다. 주말이 되면 종종 찾아가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내가 월남으로 떠난 후로는 전두환 대령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후 점점 소위와 대령 사이는 머나먼 남이 되었고 가까이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하나회가 아닌 나로서는 높은 인적 장벽을 넘어서 그분에게 접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베트남어 교육을 받고 월남으로 가서 근무를 하던 중 월남군 어학학교에서 베트남어 고급과정을 또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 배운 나의 베트남어 수준은 상당하였지만 그동안 사용을 하지 않으니 다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