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 한 알도 나누어 먹던 죽마고우들 (6화)
  제1장 덕실골과 유년기

어머니를 여의고 유품을 정리하니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주마등처럼 다가왔다. 우리 집 뒤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나무에 올라 매미를 잡고 그네를 타면서 뛰어 놀던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다.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당산나무에 빨강, 파랑, 노랑색으로 된 헌겁줄을 쳐놓고 제사를 지냈다. 별도의 서낭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당산나무에 멍석을 깔고 정월 초하루에 서낭제를 지내는 것이었다.

서낭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그 해 나이가 많고, 허물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정했다. 음식은 제관의 집에서 만들며 준비된 제물은 아낙네들이 당산나무아래까지 가져다주면 이를 남자들이 당산나무 앞에 차려놓는다. 비용은 동네에서 모아둔 돈으로 사용하며, 축문은 한학을 잘 하시는 우리 아버지가 준비하고 낭독했다.

정월대보름에는 달구집을 만들어 불기둥을 올리면서 한 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했다. 달구집은 청솔가지를 꺾어와서 큰 집채만한 것을 만들어 불을 놓으면 연기와 함께 불길이 하늘로 치솟게 된다. 달구집에 불이 붙으면 징, 북, 꽹과리 등 사물놀이패들이 흥을 돋우었다.

이때 나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줄을 달은 깡통에 숯불을 넣어 원형으로 돌리면서 밤새도록 쥐불놀이를 했다. 달구집을 태우는 집 앞 개똥논 바닥은 우리 개구쟁이들의 겨울철 놀이터이기도 했다. 벼를 거두어드린 빈 들판에서 철사와 나무판자로 만든 썰매를 타고 관솔팽이를 치면서 놀았다.
 
▲ 정월 대보름 달구집 불태우기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

1년에 몇 번씩 활동사진과 서커스가 마을로 들어왔다. 무성영화시대였기 때문에 변사의 신들린 달변에 동네 아낙네들의 눈시울은 눈물로 가득했다. 서커스가 있을 때이면 우리 개구쟁이들은 서커스 천막 아래로 몰래 들어가다가 감독에게 들켜서 하루 종일 벌을 받기도 했다.

이때 덕실골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제삿날 같은 특정한 날이 오면 대청에다 호야불을 밝히고 온 집안이 훤한 불빛 속에서 일을 했다. 호야불은 석유를 사용하는데 유리에 그을음이 생겨 자주 닦아 주어야 했다. 호야등을 닦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이 온 가족에게 밝은 불빛을 비출 수 있다는데 신바람이 났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영원한 삶의 지혜도 여기에서 얻은 것이다.

농사일이 밤늦게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당에서 곡식을 정리할 시에도 호야불을 밝히고 일을 했다. 전깃불이 없어도 호야등불이 시골의 밝음과 낭만을 더해주었다.

건너편 양촌 마을에는 5촌 아저씨가 면장을 하면서 술도가를 하고 있었다. 당시 술도가와 정미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골에서는 잘 사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동네 개구쟁이들과 5촌 아저씨 집에 가서 술을 만들고 남은 술 찌꺼기를 훔쳐 먹다가 술에 취하여 하루 종일 술주정을 했다. 이러한 친구들 중에 가깝게 지내던 죽마고우는 삼돌이와 이만이었다. 삼돌이는 나보다 한 살 위이면서 인정이 많고 진솔한 마음을 가진 6촌 형이었다. 이만이는 나보다 키는 작았지만 담력이 있고 모험심이 많아 위험한 바위 길도 잘 타고 다녔기 때문에 산에 진달래꽃을 꺾으러 갈 때면 항상 앞장을 서는 친구였다.

개천에 나가 멱을 감고 밀사리와 살구사리를 하다가 주인한테 들켜 도망하던 일들이 개구쟁이들에게는 즐거웠다. 집 앞에 있는 정자나무에 올라가 매미를 잡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옆에 있는 토란 밭에 들어가 넓은 토란 잎사귀를 따서 우산대용으로 하여 집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축구공이 없었다. 공차기를 좋아했던 우리들은 동네에서 돼지를 잡는 날이 축구시합을 하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새끼줄을 뭉쳐서 골목에서 축구를 하다가 돼지를 잡으면 불께에 바람을 넣어 축구시합을 하는 것이 개구쟁이들의 큰 행사이었던 것이다.

놀이기구가 없던 시절이라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는 우리들의 가장 재미있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집에 있는 종이라는 종이는 모두 찢어서 딱지 따먹기를 했다. 우리 집에는 형들이 부산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헌책이 많았다. 헌책을 뜯어 딱지를 만들어 개구쟁이들과 놀이를 할 때면 내가 가장 많이 땄다. 동네에서 구슬 따먹기와 딱지치기의 왕이 될 정도로 나는 놀이경쟁에도 소질이 있었다.

서당에서는 훈장선생이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는데 삼돌이와 이만이는 서당의 동기생이기도 했다. 개구쟁이 우리들은 서당에 가도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훈장선생에게 대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죽마고우들은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툴 때도 있었지만 눈깔사탕 하나를 가지고 나누어 먹는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서당에서 돌아오면 소를 먹이러 갔다. 각자 집에 있는 소를 몰고 들과 산으로 갈 때면 친구들이 함께 모여서 놀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 되기 때문에 이때가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도록 산과 들판에 방목을 하고 저녁이면 다시 소들을 거두어 왔다. 방목을 시킨 후 우리 목동들은 구슬치기와 딱지 따먹기를 하고, 도라지나 칡뿌리를 캐러 다니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한번은 우리 집 점박이 얼룩소가 큰 바위에 미끄러져서 다리를 다친 일이 있었다. 내가 다친 것 보다 더 아픈 마음을 느끼면서 치료를 극진히 한 결과 다행히 빠른 시일 내에 완쾌가 되었다. 소에 대한 나의 사랑과 정은 그 누구보다도 깊었다.

내가 이렇게나 사랑하는 점박이를 아버지는 형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강 건너에 있는 5일장에 내다 팔았다. 이날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문을 잠가놓고 혼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정이 들면 사람 못지않은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며칠간 밥을 먹지 않고 울고만 있으니까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를 사와서 나를 달래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난 소년은 영원한 삶을 위해 “남을 사랑하고 스스로 속이지 말자”라는 인생관을 가슴 깊이 새기었던 것이다.

 
  정과 사랑의 화신 어머니-2 (5화)
  한국전쟁 발발과 유년기_1 (7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