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과 유년기_2 (8화)
  제1장 덕실골과 유년기

한편 북한군 제4사단과 대항해서 낙동강 건너 현풍과 창녕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은 처치(John H. Church)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24사단이었다. 처치장군은 전방 연락단장으로 근무하다가 대전에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딘 소장의 후임으로 미 제24사단장이 된 것이었다. 현풍에서 남강의 합류지역인 남지까지 배치되었던 이 사단은 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아직까지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다. 각 연대의 병력은 편제상의 40%밖에 보충되지 않아 2개 대대씩만 유지하고 있었다.

처치 사단장은 북한군이 8월 중순 창녕으로 접근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전전투에서 얻은 경험으로 주민들을 창녕~영산선 동쪽으로 피난시키는 한편, 낙동강을 건너오려는 10여 만 명의 피난민에게는 도하를 중지시켰다. 항공력이 적보다 우세했던 유엔군은 인민군이 집결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학교 같은 큰 건물은 모두 폭격을 했다. 덕실골에도 유엔군의 전투기가 연일 폭격을 했다. 시골에서 유일한 덕곡초등학교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불타오르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철없는 나는 전쟁놀이를 구경하듯이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폭격이 심할 때면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정자나무아래 바위 밑으로 피신을 했다. 둘째 형 차기홍이가 낮잠을 자다가 미처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정자나무쪽으로 오게 되니 그것을 본 전투기가 우리에게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자나무 밑둥치에 밀어 넣고 온 가족을 꼭 껴안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가족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본능적인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폭격이 끝난 후 우리 모두는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폭격을 당한 학교에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수십 명의 마을사람들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어린 나는 전투기가 바로 머리 위에까지 낮게 떠서 폭격하는 장면이 더욱 재미있었다. 전투기가 지나가고 난 후에 나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탄피를 주우러 가겠다고 떼를 쓰면서 울기도 했다. 50구경 기관총 탄피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탄피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고, 엿장수가 마을로 오면 엿으로 바꾸어 먹기도 했다. 놀이기구가 없던 시절이라 탄피 따먹기를 하면서 노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유엔군 전투기의 폭격이 연일 퍼부어지는 가운데 덕실골로 들어온 북한군은 동네 청년들을 모두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동네 유지들은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었다고 하여 무조건 잡아갔다. 성년이 된 형과 지방유지 격인 아버지는 인민군의 표적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멀리 피난을 가야만 했다. 그러나 피난길이 막혔기 때문에 남으로는 가지 못하고 마을 뒷산으로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형들은 마을 뒤 다남산으로 올라가 땅굴을 파고 피신을 했다. 피신하고 있는 가족에게 줄 쌀과 반찬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잡고 나는 마치 소풍을 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따라갔다. 산 위에서 바라보는 저 멀리 합천읍내에서의 포성과 시커멓게 솟아오르는 포연은 마치 영화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드르륵! 드르륵!"
"쒱~ ~"
"꽝! 꽝!"

전투기에서 뿜어대는 기관총 소리가 귀청을 찢어지게 했다. 산 아래 자락으로 낮게 날라가는 전투기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에게 장차 군인이 되어 저렇게 전쟁터에서 싸워보고 싶은 충동까지 가지게 했다. 북한군은 통신수단이 미흡했기 때문에 봉화를 이 산 저 산에 올려 상호간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봉화로 인하여 밤마다 높은 산에서는 불기둥이 높이 솟아오르고, 낮에는 연기가 이 산 저 산에서 치솟았다.
 
▲ 1950년 8월 미 폭격기들이 구미 일대에 융단푝격을 가하고 있다

산에 숨어 있는 아버지와 형들에게 먹을 것을 운반해 주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내려와 보니 북한군 1개 중대병력이 우리 집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 있는 돼지와 닭을 다 잡아 먹고 밥까지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족이 산속에 숨어있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무 말 못하고 북한군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전투를 치르는 동안 우리 집은 그들의 중대본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 가축과 쌀을 다 먹고 난 다음에는 동네에 돌아다니면서 소와 돼지를 잡아와서 어머니에게 밥을 지어달라고 했다. 밥을 할 동안에 나는 대청마루에 쉬고 있는 북한군들의 따발총과 장총을 만지면서 신기함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내려오면서 총 한방 쏘지 않고 거침없이 내려왔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군은 아무런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낙동강까지 밀려 온 것이었다.

하폭이 200~500m나 되는 낙동강을 건너는데 도하장비가 부족했던 북한군은 뗏목을 사용했다. 뗏목을 만드느라고 마을에 있는 나무와 판자들을 모두 거두어 갔다. 심지어는 집에 있는 대문짝까지 떼어 갔기 때문에 덕실골은 모두가 대문이 없는 집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 마을에서 미인으로 알려진 6촌 누나 차기분이가 덕곡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북한군들이 누나를 아랫마을에 있는 대대본부로 끌고 가서 시중을 들도록 했다. 이때 아버지와 큰형 차기환이도 산에서 붙잡혀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죄목은 유엔군이 곧 들어온다는 말을 마을사람들에게 전파했고, 동네유지로서 비교적 잘 살고 있는 반동분자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큰형은 북한군으로부터 온갖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를 산채로 매장하려고 형에게 삽을 주면서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이러한 명령에 불복한다고 하여 형을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게 죽인다고 하여 자기들 간에도 다툼이 있었다. 당간부와 전술간부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6촌 누나가 반공호로 끌려가서 겁탈 당하려고 하는 것을 형이 달려가서 목숨을 걸고 구출하는 바람에 병영 전체에 소란이 일어났다. 이 사실이 북한군사령부에까지 보고가 되어 그들 상관의 지시에 따라 아버지와 형 그리고 6촌 누나는 석방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너무나 큰 고통을 당했던 6촌 누나는 나중에 정신을 잃고 결국 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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