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사령부 업무는 군정위 수석대표인 내가 주로 맡아했다.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 틸레리(John Tilleli) 장군은 모자를 7개(직책이 7개)나 쓰고 있기 때문에 유엔사 업무에 대해서는 관여할 시간이 없었다. 유엔군사령부 예하부대는 미군을 제외하고 모두 철수를 한 상태이었다. 미군도 판문점 경비병력과 의장병력 외에는 미태평양 사령부로 작전통제권이 이양된 상태이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는 정전협정을 유지, 관리하는 기능이 주요핵심 업무가 되어있었다.
장군으로 보직되어있는 미국 및 영국 군정위 대표와 기타 참전국 대표들이 만나 나의 주관 하에 1주일에 한 번씩 유엔사 업무에 대한 토의를 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유사시 참전하게 될 제3국 군대를 수용하기 위해서도 평소부터 잘 관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전협정 위반사항을 감독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도 나의 소관 하에 있었다. 중감위는 유엔군 측에 스위스, 스웨덴이 나와 있었고, 공산군 측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1993년 4월부터 북한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강제로 철수시켰다.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고 미국과 직접 대화를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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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군 현안업무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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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판문점에서 캠프를 설치해서 정전협정위반사항을 감독하던 중감위의 기능도 마비가 되었다. 공산군 측 중감위 요원들은 서울로 와서 유엔군 중감위 요원들과 함께 정전협정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 철수당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은 성실하게 자기들의 기본임무를 서울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모든 협약을 무시하면서 스스로 외교적인 고립을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새로운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기존의 정전협정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유엔군사령부 후방지휘소가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유엔군이 다시 들어올 것에 대비한 것이다. 후방지휘소의 역할은 유엔군의 군수물자 저장과 중간기지 역할을 하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전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유엔사 후방지휘소이기 때문에 군정위 수석대표인 나는 유엔사 장교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요코다 미5공군사령부, 요코스카 미7함대사령부, 오끼나와 미해병대사령부 등을 방문하면서 주일미군의 전비태세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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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사 장병들과 함께 (가운데 흰 예복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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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일안보조약에 따라 미일동맹이 강화됨으로써 유엔사와 일본과의 관계도 밀접해 지고 있었다. 유엔사 후방지휘소에 갈 때면 일본 자위대를 비롯해서 방위청에 대한 현황도 함께 알아볼 수 있었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역할이 무엇인지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유엔군사령부의 업무를 능률적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참전국 대표들과의 친선활동이 중요했다. 한국의 문화, 풍습, 역사, 전통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고 익히게 하는 것도 유사시를 대비한 전투태세 완비의 일환이었다.
명절이면 윷놀이, 제기차기, 연날리기 등을 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풍습을 이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격언과 같이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한국 문화와 풍습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이들에게 강조하면서 한국을 이해시키는데 노력했다. 그들은 한국의 미풍양속을 대단히 좋아했다. 윷놀이만 하더라도 규율을 다양하게 만들어 놓으면 어떤 민속놀이보다 흥미롭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과는 달리 노래를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래방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18번은 하나씩 다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들과 같이 노래방 문화가 발달되지 않아 노래를 시키면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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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군사령부 요원들을 위한 가족 윷놀이 (중앙에 한복상의를 입는 사람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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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 풍습에 맞추기 위하여 노래방에 자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노래를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대단히 소극적인 자세이었다. 그러나 꾸준히 노래도 가르치고 춤도 배워주면서 우리 문화에 적응시키니까 나중에는 그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업무에 바쁜 나에게 귀찮을 정도로 노래방에 가자고 졸랐다. 비공식적인 교류를 통해서 유엔군사령부의 친목이 강화되고 신뢰도 쌓이게 되었다. 신뢰와 믿음을 통해서 유사시를 대비한 전투태세도 완비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 9일, 장녀 수진이가 결혼을 했다. 중매를 시켜줘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던 수진이가 어느 날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나온 김주혁이라는 청년이었다. 첫인상이 좋고 장래성이 촉망되는 능력있는 젊은이로 보였다. 심성이 착하고 명문가정에서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중요했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사람을 소개해도 본인들이 싫으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내와 나의 생각이었다.
한미연합사령부 장군식당인 Hartel House에서 양가부모와 가족이 상견례를 했는데 사돈도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훌륭한 분이었다. 수진이 시누이가 될 사람도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봉직하고 있는 교양과 덕망을 겸비한 훌륭한 분이었다.
사위 김주혁은 한국 최고의 자동차회사 본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그 회사에 나의 육사동기 민성기 장군이 그의 상관으로 있었다. 민장군에게 김주혁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했더니 민장군의 평가는 내가 보는 것 이상으로 후한 점수를 주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용산에 있는 육군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민성기 장군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양가가 모두 개혼이라 하객들도 많았다. 금실 좋은 딸 사위부부를 보면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