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로서 (57화)

전역을 한 후 한동안 할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매일 출근을 하다가 집에서 쉬게 되니 생활의 리듬이 깨어져서 건강에도 해로웠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기생들이 삼식이가 되어 집에서 미운 오리털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삼식이는 하루 3끼 식사를 집에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집사람은 삼식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삼식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전역한 동기생들과 등산, 골프, 낚시, 바둑 서예 등 평소에 하지 못했던 취미생활을 했다. 교회에 나가는 주일을 제외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과표를 만들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보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1000세대가 넘는 주상복합아파트 아이파크분당에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각종 동호회가 잘 되어있었다. 서예, 골프, 등산, 낚시 등 아파트주민들의 모임이 활발했다. 짧은 시간 공부한 서예솜씨로 전시회까지 했다.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라 하자가 많았다. 새로 입주한 주민들이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했다. 내가 초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주민들을 위한 하자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목표가 없는 생활은 무의미함을 느꼈다.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배우는 것은 나이에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생을 통하여 배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였다. 현역에 있을 때 고려대학교와 미국 트로이 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박사과정에 들어가기로 했다.

▲ 삼식이 때 태릉CC에서 골프 (왼쪽부터 필자, 김재명 장군, 강성철 장군, 이해종 장군)

수소문을 하니까 서울에 있는 경남대학교 분교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경남대학교는 원래 해인대학교가 모체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의 동생 박재규가 해인대학을 인수하여 마산에서 경남대학교를 창설했던 것이다. 경남대학교 부설 북한대학원과 극동문제연구소가 서울 삼청동에 있다.

박재규 총장을 찾아가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나의 경력과 학력을 보더니 대환영이었다. 입학절차를 밟으니 나만큼 자력을 갖춘 적격자가 드물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만학도로서 젊은이들에 못지않는 공부를 했다.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정석명 사장이 자기 회사에서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정석명 사장은 ㈜두손21이라는 아동복 회사를 직접 경영하고 있었다. “Cankids”와 “Pippy”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아동복을 제조해서 전국 유명백화점에 유통시키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아동복 회사였다.

㈜두손21에서 사회를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쾌히 받아들였다. 일생을 군대생활만 하다가 전역한 후 일반사회를 잘 몰라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장교가 전역하기만 기다렸다가 사회물정을 모르는 예비역에게 접근하여 퇴직금까지 다 털어가는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정석명 사장은 나에게 친절히 사회물정을 가르쳐주었다. 제조업에서 판매업까지 모두 총괄하기 때문에 ㈜두손21은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직원만 하여도 수백 명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깔려있는 백화점 점포 80여 개를 관리하는 데는 많은 손이 필요했다.

나는 기초부터 배우는 자세를 가지고 몸으로 뛰었다. 공장에서부터 매장까지 발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니까 세상물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군대용어에만 익숙해 있다가 일반사회용어를 이해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회계와 경영기법을 책상에서는 공부를 했지만 실물경제에서는 처음으로 해보는 과정이었다.

내가 군에서 컴퓨터관련 경험이 있으니까 정 사장은 회사 전산망을 구축하는 작업을 나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컴퓨터를 통한 전산거래망을 완성해놓으니 업무의 능률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종전에는 백화점이 문을 닫을 시간에 점장들은 그날의 결산을 정리해서 팩스로 본사에 보고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본사에서는 전국 80개 점포에서 판매된 결과를 다음날 아침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전산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본사와 각 점포를 연결해 놓으니 실시간으로 판매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화선에 노트북만 연결하기 때문에 쉽게 전산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각 점포에서 리드기로 바코드를 찍으면 품명, 수량, 사이즈, 가격 등이 실시간으로 본사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왔다. 이 데이터는 공장으로 연결되어 매진되어가는 품목을 즉각 제조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제조로부터 판매까지 시스템 상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도 보람을 느꼈다.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도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정석명 사장과 나는 친구이면서 형제와 같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월드컵2002가 개최되었을 때 상암경기장에서 월드컵 4강전을 정석명 사장과 함께 구경했다. 우리가 앉아있는 좌석 뒷편에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붉은 악마의 대형 현수막과 슬로건이 경기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경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는데 서해 제2연평해전 소식을 접했다. 북한해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우리 해군 제2함대 장병 6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5도서해역은 남북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한반도의 화약고와 같은 곳이다.

남쪽에서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를 하는데 북한이 잔치집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군복을 입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석명 사장과 나는 일방적으로 당한 제2연평해전에 대한 울분을 삼키면서 밤새도록 소주잔을 나누었다.

A+ 박사학위

경남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과정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서울 삼청공원으로 올라가는 감사원 옆에 위치한 교정은 조용하면서 면학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박사과정은 세미나 발표가 많았다. 발표는 내가 항상 솔선수범해서 했다. 최신식 도서관에는 북한관련 자료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시간이 나면 항상 도서관에서 생활을 했다. 김성진 도서관 직원은 나의 자리를 고정적으로 배려해주었다. 북한에 대한 자료를 많이 찾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자료실은 내가 독차지했다. 노동신문을 비롯하여 최신 북한소식은 내가 제일 먼저 받아보았다.

▲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는 필자

심지연, 함택영, 최완규 교수 등은 나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젊은 교수들이었지만 만학에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사과정 5개 학기 36학점을 올 A+로 받았다.

1학기에는 시민사회와 지방정치, 동북아 국제관계세미나, 고대․중세서양정치사상, 대중매체와 선거, 비교정당론을 각각 3학점씩 수강했다. 2학기에는 정치변동이론세미나, 한국외교정책세미나, 현대정치이론을 수강했다. 3학기에는 비교정치가정론, 현대중국정치세미나, 외교정책세미나, 국제관계이론을 공부했다. 4학기에는 현대일본정치세미나, 국제분쟁연구세미나, 현대민주주의사상, 비교정치경제론, 정치학방법론을 수강했다. 마지막 학기에는 한국정치론을 수강하고 논문을 썼다.

논문은 “한반도 정전체제 연구(부제:쟁점 및 평화체제로의 전환방안)”였다. 논문심사는 심지연, 함택영, 임용순, 이서항, 최완규 교수가 맡았는데 심지연교수가 심사위원장이었다. 최완규 교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논문지도를 자상하게 해주었다.

2003년 7월 24일 드디어 논문이 통과되었다. 학점을 따도 논문이 통과되지 않아 학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외국어 시험과 논문심사에 합격을 해야만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은 김용우, 김윤태, 김재홍, 박홍도, 윤란, 조부근, 천병한, 현성일 등이었다. 현성일 씨는 북한에서 실세로 있는 최고위층의 자제로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탈북을 한 분으로 북한에 대한 산 정보를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논문통과를 가장 먼저 했고 학위도 제일 먼저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매년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교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