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 학군단 창설 (65화)
  제9장 강단에 서고 견문도 넓히고

청주대학교에서 6년간 강의를 하다가 평택대학교로 옮겼다. 평택대학교에서 나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학회에서 주제발표와 토론자로 많이 참석하고 있던 때였다.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제정치학회에서 이사로서 활동을 하면서 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많은 교수들과 넓은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이었던 중앙대학 김형국 교수가 평택대학교에서 나를 필요로 하니 학교를 옮길 생각이 없는가 하고 의사를 타진해 왔다. 서울에서 청주까지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복잡한 고속도로를 뚫고 매일 청주까지 왕복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는 상태였다. 분당집에서 평택까지는 청주의 반밖에 안되는 40분 거리이다. 평택대학교는 기독교정신을 이념으로 해서 창설된 학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로서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학교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생각했다.

평택대학교에서는 학군단을 창설 중이었다. 새로 학군단을 창설하는데 오랜 군 경험을 가졌으면서 대학에서 실무경력을 가진 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학군단을 새로 창설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업의 하나이다. 전국 200여 개 4년제 대학 중에서 학군단이 있는 대학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대학에 학군단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으로 학교를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평택대학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수도권 명문대학이다. 1912년 피어선 박사(Dr. Arthur T. Pierson)의 유지에 따라 서울 서대문에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 조기흥 총장에 의해 신학, 사회복지학, 음악학과를 모체로 하여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서울에서 평택으로 이전하였고, 1996년 피어선대학에서 평택대학교로 개명을 했다.

대학의 필요성과 나의 구미가 일치해서 평택대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평택대학교를 세운 조기흥 총장을 처음으로 면담할 때 덕망과 믿음과 자비의 화신을 보는 듯 했다. 우리 한국의 특성상 사립학교 설립자는 족벌경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그러나 조 총장은 당신의 직계는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도 대학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장손이 평택대학교에 2번이나 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미달된다고 하여 결국 불합격시킨 분으로 이름나 있다.
 
조기흥 총장이 나를 정교수로 승진시켜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니 나를 알아보는 총장이 더욱 존경스럽고 평택대학교에 대해 마음이 끌렸다. 대학에는 비정규직에 해당되는 비전임교수와 정규직에 해당되는 전임교수가 있다. 비전임교수로는 명예교수, 석좌교수, 객원교수, 대우교수, 초빙교수, 겸임교수 등이 있고, 전임교수는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가 있다.

정교수는 교수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해당되는 직위로서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정년퇴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정교수로 보직 받아 총장을 도와서 평택대학교를 위해 마지막 열정을 다하면서 새로 창설되는 학군단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 속에 평택대학교 학군단은 창설되자마자 전국대학 학군단 중에서 훈육관 자질, 후보생 수준,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평택대학교에서의 강의는 청주대학교 못지않게 의욕과 긍지와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내 강의를 듣기 위하여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수강신청 기간이 되면 매 과목당 100명 정원에 두 배 이상의 학생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강의실이 좁아서 강당에서 강의를 해야만 했으며. 학생들에 대한 나의 인기도 절정에 달했다. 캠퍼스를 다니게 되면 멀리서 나를 보고 “교수님!” 하고 달려와 인사를 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교수로서의 보람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평택대학교에서 학부강의를 하고 있는 필자

내 강의는 여학생들이 더 많이 수강신청을 했다. 남학생들은 의연한데 여학생들은 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스승의 날에 꽃을 가슴에 달아주면서 귀여움을 더해주었다. 축제 때가 되면 학생들과 어울려 춤과 노래를 하면서 젊음을 함께 했다.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는 가운데 몸과 마음이 모두 젊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충정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혼신을 노력을 다했다.

강의를 하면서 국제교육원장이라는 보직을 맡았다. 국제교육원은 주한미군, 다문화가족, 유학생, 교환학생들에게 한국학 등을 가르치고, 한국 학생들에게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가르쳐서 글로벌화된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다. 또 국제적인 협력관계와 교육을 담당하면서 세계로 뻗어가는 평택대학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구가 국제교육원이다.

평택은 주한미군이 집결되고 있는 지역이다. 평택에서 유일한 4년제 대학교인 평택대학교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 동화교육을 시키고 있다. 한국에 오는 미군들은 처음으로 외국근무를 하는 병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한국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평택대학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미군들에게 한국 문화, 역사, 풍습 그리고 기초적인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한국으로 전입 오는 모든 미군들에게 Head Start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매주 3일간씩 교육을 시키고 있다. 연간 1,500명 이상의 미군을 평택대학교 국제교육원이 교육시키면서 한미유대강화와 주한미군의 범죄예방에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

또 평택대학은 다문화가족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결혼이민 여성에 대한 한국동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한국어 습득과 한국 풍습 및 문화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특히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부부간에도 문제가 생기고, 가족간에도 불화가 발생하고 있어 결국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결혼이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해도 기본적인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먼저 한국에 정착한 결혼이민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보조교사 교육을 시킨 후 이들을 활용하여 교육을 하니까 능률이 올랐다. 기본적인 강의 이외에 국제교육원장으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평택대학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더욱 깊어졌다.

 
  알래스카 탐방 (64화)
  성지순례 / 모세의 발자취를 따라서_1 (66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