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29일!
사관학교를 포함하여 만 37년간 입었던 유니폼을 벗고 전역을 했다. 군생활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애착이 많았던 제37사단 연병장에서 선후배, 친지동료 및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전역식을 가졌다. 전역식에 참석했던 친구 김기봉 씨가 보내온 아래 글로서 당시 장면을 대신한다.
차기문 장군 전역하는 날에 즈음하여
중부지방에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빗나갔는지, 푸르고 높고 높은 가을하늘, 목화송이 구름꽃 사이로 아직도 따가움이 남아있는 햇살이 연병장에 선 장병들의 콧등에 작은 옥구슬을 메달아 주는 2000년 9월 29일 금요일 오후! 충청도 청주근교 증평벌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제37보병사단 연병장, 골프장 페어웨이를 연상케 하는 고운 잔디 위에 장병들이 완전군장을 한 차림으로 정렬하여 사열대 양단에서 펄럭이는 붉은 색의 육군 3성기와 수많은 장성기를 주시하며 부동자세로 서 있다.
정숙을 깨는 군악대의 팡파르와 함께 사열대에 도착한 붉은 성판을 단 검은 승용차에서 내려서는 3성장군 부부! 장군의 양 어깨에 달린 별은 초가을 햇살에 눈부시고, 가슴에 달린 수많은 훈장은 만추의 수확처럼 풍요로워 보이고, 장군의 눈은 잔잔한 호수 위에 비치는 영상처럼 애잔한 추억이 어렸더라.
“인사명령 제127호, 육군중장 차기문은 37년간 숭고한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고, 명예로운 전역을 하게 되므로,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에 편입함.
2000년 9월 29일. 대통령 김대중”
37개 성상의 기나긴 행로의 영광과 명예와 번뇌가 한 줄의 인사명령으로 마감한다는 사실이 웬지 믿어지지 않는데도, 37년 전에 화랑대에서 받은 한 줄의 인사명령을 국가에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인지, 사열차에 올라 병사들의 경례를 받는 장군부부의 담담한 표정위로 가을바람이 스치더라.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군생활을 마감하는 오늘까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육군중장까지 승진한 영광 하나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찬 인생이었다”고 술회하는 장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기꺼이 선택한 사관생도시절! 태백준령을 누비면서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지휘하던 소대장시절! 월남의 정글 속에서 생사의 분수령을 넘나들던 청년장교시절!” 등 주옥같은 추억을 회고하며 마음에 새기는 듯 힘주어 말하는 장군의 표정은 경련이 이는 듯 하더라.
“스스로 선택한 군생활, 참되고 명예로운 군인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내했던 떳떳하고 후회 없는 시간들이었다”고 만족해하는 장군에게 참석한 모든 하객들과 장병들은 성공한 인생에 대한 부러움과 존경의 눈길을 한없이 보내주더라.
“해빙이 될 때 위험에 조심하고,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세계 석학들의 경고를 떠올리며 “우리 민족이 전쟁의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남북이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튼튼한 국가안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통일의 환상에 사로잡힌 당면한 국가적 상황에 대한 염원과 당부도 잊지 않은 장군은 “37년간 입었던 명예와 영광의 상징인 푸른제복을 벗고 평범한 시민으로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노병은 떠납니다.”
“차기문 장군님에 대하여 받들어 총!”이라는 제병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충성!”이라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군악대가 연주하는 경쾌한 멜로디의 3성장군에 대한 예는 마지막 인사되어 푸른 창공의 메아리로 흩어지더라.
다과회장에 모인 하객들과 함께 건배를 권하는 현직 사단장은 이렇게 소개한다. “차기문 장군님의 장인 김선규 장군께서 60년대 후반에 이곳에서 제10대 사단장을 역임하셨는데, 그분의 사위인 차장군님께서 1994년도에 또 제25대 37사단장을 지내셨습니다.”라고 하니 차기문 장군 대답인즉 “저는 37이란 숫자와 인연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장인께서 37사단장을 역임했고, 저 또한 37사단장을 지냈으며, 37년간의 군생활을 37사단에서 마감하는 오늘이 바로 저의 집사람 생일입니다.”라고 하니, 박수를 보내주는 하객들은 장군의 부부가 어떻게 만났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더라.
동기, 동창, 친구, 교우, 후배, 친지 등등 꽃다발과 기념품을 증정하는 순서 중에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예쁘게 생긴 딸이 사위와 함께 나와 꽃다발을 아버지 품에 안겨드리고 아버지 볼에 입술을 갖다 대는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이고, 아버지는 역시나 기쁘고 즐거우면서도 쑥스러운 표정이 역역하더라. 어느 직장 어떤 직위에 있던 사람의 퇴임식이 이렇듯 화려하고 당당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어떤 직장도 목숨을 담보로 한 직장은 없다. 오직 군이 있을 따름이다. 그 목숨의 담보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함이다. 그 이상 더 성스럽고 자랑스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그 성스러운 직업에 청춘을 다 바치고 물러나는 장군은 사선을 넘나들며 고생한 것은 뒤로 두고, 영광과 행운에 감사하며 만족한 발걸음으로 군문을 나서는데, 사령부 본관에서 정문까지 5리가 넘는 연도에 늘어선 장병들의 환송 박수는 인생의 참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계기인 듯 싶더라.
장군이시어! 수많은 선배 장군들이 명예와 영광의 상징인 제복을 벗고 나서 온갖 영욕에 휘말리어 성스러운 명예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순간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비록 제복은 벗었지만 부디 언제나 오늘처럼 당당하고 명예롭고 존경 받는 삶이 지속되시길 우리 모두는 기원합니다.
글쓴이 : ㈜대한통운 택배사업 본부장 김기봉
위 글을 쓴 김기봉 씨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기로서 죽마고우 이상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친형제와 같은 사람이다. 이 글에서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나에게는 추억의 옥고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