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_1 (59화)
  제8장 제2의 삶

대학에서 북한학을 강의하면서 북한을 한번 갈 볼 필요가 있었다. 폐쇄적인 사회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북한이기 때문에 1차 자료획득이 제한되고 자료검증도 어려움이 많았다. 직접 북한현실을 눈으로 보지 않고는 정확한 북한정보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정부 시대에는 북한을 비교적 쉽게 갈 수 있었다.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북한을 직접 다녀오기로 했다. 주로 교수들로 구성된 우리 북한방문단은 평양, 남포, 영변, 묘향산, 청천강, 자강도, 양강도, 용문대굴 등을 둘러보았다.

인천공항에서 전세기를 타고 약 50분 정도 비행하니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공항, 낡고 오래된 기종의 조그마한 비행기 몇 대만 덜렁 서 있는 활주로, 커다란 김일성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던 공항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순안비행장에서 평양까지는 4차선 고속도로로 되어 있었는데 자동차로 약 40분 소요되었다. 북한의 고속도로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손으로 포장을 했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순안 국제공항에서 평양까지 가는데 2~3대의 차량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앙분리대가 없어 농부들이 소를 몰고 고속도로를 가로 질러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양 순안 국제공항

인구가 350만인 평양은 핵심공산당원 등 선택된 주민들만 거주할 수 있는 도시이다. 평양시내로 들어가면 개선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개선문 한쪽 기둥에는 1925, 또 한쪽 기둥에는 1945라는 숫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김일성이가 13세 때인 1925년에 평양을 떠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1945년에 평양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김일성 개인의 개선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시내의 교통은 차가 많지 않고 여자 교통순경이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주로 걸어서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가끔 일제 낡은 트럭 위에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북한사람들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고, 담배를 선물로 주면 제일 좋아했다. 살기가 어려우니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 같았다.

평양에서 가장 큰 호텔은 고려호텔인데 여기에서 남북간에 회담을 하고, 외국 관광객들이 묵고 있었다. 호텔방에는 TV가 있었는데 17:00~ 23:00까지만 방영되었다. 프로그램은 모두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만약 남북이 TV방송을 개방하게 된다면 남한사람들은 북한TV를 한 시간만 보면 실증이 나서 채널을 돌려버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밤에 호텔 밖을 나가니 거리가 암흑세계와 같았다. 가로등이 있지만 전기사정이 어려워 가로등을 켜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양냉면 맛을 보기 위하여 대동강변에 있는 옥류관에 갔더니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평양냉면이 좋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빈대떡 한 접시가 나오고 이어서 냉면이 나오는데 서울에서 먹는 냉면보다 맛이 더 좋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김일성 광장에서

평양에는 단고기가 유명하다. 보신탕을 단고기라고 하는데 거리에서 단고기집 간판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시설도 다른 음식점에 비하여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단고기는 부위별로 나왔다. 간, 창자, 다리, 배, 머리 등 부위별 요리가 나온 후 마지막으로 탕이 나왔다. 역시 단고기도 서울에서 먹는 보신탕이 우리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김일성 광장 옆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대동강에서 손을 씻으려고 하니 물이 더러워서 손을 넣기가 싫을 정도였다. 북한은 환경오염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동강 물의 오염상태가 심각했다. 에너지가 부족하여 가동되지 않는 공장들이 많았지만 가동되는 공장에서도 굴뚝연기가 시커멓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북한은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환경보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북한은 결혼을 할 때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하면 당일로 신랑집으로 신부를 데리고 간다. 신랑집으로 갈 때 강변이나 공원 등에서 사진을 찍는데 우리가 갔을 때 모란공원과 대동강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평양에 지하철 2개 노선이 있지만 역이 모두 16개 밖에 되지 않아 서울 지하철의 1개 노선보다 더 짧은 상태였다. 지하철은 지하 300미터 깊이에 있었다. 이는 유사시 대피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복역에서 천리마역까지 지하철을 한번 타보았는데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잘 되어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없으면 지하 300미터까지 내려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역 벽에는 호화로운 벽화가 잘 그려져 있었다. 이는 외국인에게 평양에도 좋은 지하철시설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지하철을 타니까 남조선 손님들을 위하여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 모두 자리를 양보해 주어서 우리 일행은 자리에 앉아서 지하철을 시승할 수 있었다.

우리의 청소년회관 개념인 학생소년궁전이 평양시내에 있다. 관광객들이 볼 수 있도록 청소년들이 노래, 무용, 가야금. 서예 등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을 위하여 공연까지 준비해놓았는데 공연 관람요금을 지불하고 봐야 했다. 북한은 외화가 부족하여 외국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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