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교육의 요람지 육군대학 (35화)
  제6장 영관 시절

소령진급을 하고 육군대학에 가서 고급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을 받았다. 당시 육군대학은 진해 천자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해는 군항도시이면서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여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아름다운 곳이다. 천자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살기 좋은 진해가 군인가족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가족들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아름다운 항구도시에서 테니스, 배드민턴, 낚시, 등산 등을 즐겼다. 그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장교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전략 전술의 요람지인 육군대학은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했다. 학교 성적은 바로 진급 및 보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최선을 다하여 좋은 성적을 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육군대학은 입교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정규과정과 단기과정이 있었는데, 정규과정은 1년이었고, 단기과정은 6개월 코스였다. 1년 과정인 정규코스는 3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시험을 주관하는 육군본부 주위에는 정규과정에 들어가기 위하여 합숙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육군대학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서울용산 해방촌 군인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거실도 없는 9평짜리 아파트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원자재로 지은 튼튼한 집이었다. 비록 연탄보일러이었지만 난방이 잘 되고, 통풍이 잘되어 살기에 편리했다. 이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서 보직을 받고도 몇 달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운이 좋아 비교적 빨리 해방촌 군인아파트에 입주하였는데 이때 수진이는 젖먹이였다. 육군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이 좁은 아파트에서 최선을 다하여 공부를 한 결과 최연소나이에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모두가 소령, 중령들이었는데 대위로서 육군대학에 합격한 사람은 4명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육군사관학교 23기 동기생으로서 나를 비롯하여 노남섭, 유재현, 정화언 대위였다.

1975년 육군대학 제19기로 들어가서 1976년에 졸업을 했다. 육군사관학교 23기 동기생 중에 육군대학을 가장 먼저 들어간 우리 4명은 학생들 중에 서열이 가장 낮았기 때문에 제일 낙후된 C관사를 배당 받았다. C관사는 천자산 기슭에 위치한 연립관사로서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방안에는 항상 가스 냄새가 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맨 땅이라 비가 올 때면 진흙투성이였다.

다행히 집 앞에는 텃밭을 만들 수 있는 공터가 있었다. 봄이 되면 씨앗을 뿌려 야채를 가꾸는 즐거움을 이웃 장교들과 함께 나누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면 동지로서의 정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육군대학에서 어려운 과정을 함께 겪었던 4명의 동기는 군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가까운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었다.

각반에서 막둥이인 우리 4명은 모두가 교반총무라는 심부름꾼이 되어야 했다. 계급이 낮으니 교관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교관들은 모두 선배들이기 때문에 선배기수들은 교관들과 접촉을 하면서 시험경향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막둥이 4명은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 진해 육군사관학교 터 / 육군대학은 1951년 10월 경상북도 대구 달성초등학교에서 장교 13명, 병 42명으로 창설되어 사단급 장교의 교육을 맡았다. 1954년 7월 경상남도 진해로 이전한 뒤, 1995년 11월 지금의 위치인 대전시 유성구 자운로로 옮겼다.

밤을 새우면서 공부를 하고 휴일에도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시험은 8시간 연속해서 보았다. 지도를 내어주고 사단 및 군단 작전계획을 만들어 내라는 문제가 부여되었다. 적정을 분석하고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아군이 작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도상계획으로 풀어내는 문제였다.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고 8시간 동안 시험을 보고 나면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육군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목숨까지 잃는 학생들도 있었다. 옆집에 살고 있는 장교가 시험공부를 하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감기가 든 상태인데도 다음날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건강조절을 못했던 것이었다. 약을 과도하게 복용한 채로 무리하게 밤을 새우다가 생명을 잃은 것으로 진단이 나왔다.

남편들이 공부하는데 아내의 내조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공부를 하다 보면 밥맛이 떨어지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니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인가족들은 진해시장에 나가 장어, 메기 등 고단백 생선을 사다가 남편에게 먹였다.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산 넘어 마산까지 나가서 사가지고 오는 극성을 보였다.

천자봉 아래 도불장이라는 약수터가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거기에 올라가서 생수를 마시고 등산을 하는 것으로 건강관리를 했다.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운동이 되고 아침 일찍 맑은 공기를 마시게 되니 정신까지 맑아지면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약수터로 이어지는 이슬 젖은 오솔길은 낭만적이었다. 길가에는 개구리들이 도열을 하고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일제히 길옆으로 흩어졌다.

새벽 등산으로 건강관리를 하면서 전략 전술 공부에 열중하게 되니 나의 학교 성적은 항상 좋은 결과가 나왔다. 우등으로 육군대학을 수료했던 것이다. 내가 입학할 때 수석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졸업할 때에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겠다는 책임감이 우등이라는 영예를 가질 수 있게 했다. 우리 4명의 동기생에 이어 다음해부터는 많은 동기생들이 뒤를 따랐다.

1976년 7월 19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나는 의정부에 있는 한미1군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이때부터는 고급장교로서 전략 전술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당장 국방장관, 참모총장을 맡겨 주어도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육군대학에서의 좋은 성적은 나중에 미국 지휘참모대학에 가는데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상무대 고등군사반으로 (34화)
  한미1군단 작전장교와 8․18도끼 만행사건 (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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