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범죄수사대장 숙소로 가니 사모님이 저녁을 잘 차려놓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여동생과 함께 나를 맞이했다. 미인인 사모님을 닮은 그 처녀는 수줍은 얼굴로 자기 형부의 눈치를 살피면서 나에게 친근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안종하 소령은 나를 자기 처제한테 소개시키려고 저녁식사까지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대는 곧 설악산으로 이동하여 대간첩작전을 하도록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설악산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밤에 잠을 잘 때에도 그 미인 처녀가 눈에 삼삼했다. 미시령과 신흥사 일대에서 작전을 하느라고 소대장을 마칠 때까지 산속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범죄수사대장의 처제는 영원히 만나지를 못했다.
이 시기에는 북한에서 내려 보낸 무장간첩들이 극성을 부렸다. 가장 큰 사건이 1․21 청와대 습격사건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124군 특수부대에 소속된 무장간첩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청와대를 습격한 것이었다. 한국군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여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했던 것이다.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난사했다.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 당했다.
군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내림과 동시에 현장으로 출동하여 29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으며 1명은 북으로 도망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했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전향하여 목사가 되었다. 북으로 넘어간 박재경은 북한에서 영웅적인 대우를 받고 차수가 되어 인민무력부 부부장까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68년 10월 30일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이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많은 선량한 민간인들이 이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기슭의 외딴집인 이석우(37세)씨 집에 무장공비 7~8명이 침입했다. 이 씨의 부인 주대하(34세) 씨, 2남 승복(9세)군, 3남 승수(7세)군, 장녀 승자(4세)양 등 일가족 4명을 무참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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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진, 삼척에 침투한 무장공비 잔당 사살 신문기사 (동아일보 1968. 11.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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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나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미시령과 신흥사 일대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도주하는 무장공비를 차단하는 작전을 했다. 엄동설한에 참호를 파고 온돌을 급조해서 만들었다. 온돌은 보온대책을 수립하는데 최상의 장치였다. 눈이 많이 와서 보급로가 두절되었다. 소대원들은 보급이 끓긴 상태에서 현지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눈 속을 헤치고 칡뿌리를 캐어먹고 눈 속에 남아있는 빨간 산열매를 따먹으면서 보급이 될 때까지 허기를 모면했다.
나의 전령은 작전을 나갔다가 오면 반합에 밥을 해서 자기 가슴 속에 품고 있다가 나에게 따뜻한 밥을 먹으라고 내어 놓았다. 그러나 소대장이라고 혼자서 먹을 수 없었다. 전령이 정성들여 만든 밥을 혼자 먹어도 모자랐지만 이 밥을 소대원들과 한 숟가락씩 나누어 먹으면서 적을 잡는데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을 했다.
미시령을 넘어가는 모든 차량은 우리들의 교통통제를 받았다. 적이 차량을 탈취하여 지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검문을 받도록 한 것이다. 야간에 검문을 해보면 나무를 채취해서 서울로 실어 나르고, 참나무 숯을 구워서 운반하는 불법 차량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대간첩작전을 하는 병사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속초에서 가져온 오징어와 갈치 등을 몇 상자씩 위문품 형식으로 내려 놓고 갔다. 그러나 순수한 위문이 아닌 잘 봐달라고 주는 대가성 생선상자는 일체 거부했다.
이러한 작전을 하는 가운데 눈 속을 헤치고 북상하는 모든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했다. 겨울에는 작전을 하는데 아군이 대단히 유리했다. 눈 속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무장간첩들이 바위 밑에 모여 있었다. 토끼몰이와 올가미작전으로 포위해 들어가니까 오랫동안 굶주린 무장공비들은 완전히 소탕될 수밖에 없었다.
대간첩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 소대는 인제 주둔지로 복귀했다. 소대장 1년을 마친 후에는 다른 병과로 전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일부 동기들이 헌병, 경리, 부관, 법무 등 지원병과로 전과를 했다. 나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헌병으로 전과를 하라는 권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전투병과에서 계속 전진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전투병과 중의 전투병과인 보병에 계속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