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실골에서 대구로 (11화)
  제2장 객지의 청소년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덕실골에서 대구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대단히 미흡했다. 2시간 이상 걸어서 이방까지 나오면 하루 2~3대씩 진주에서 대구로 운행되는 버스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당시 천일여객, 경전여객 등의 버스가 다니고 있었는데 버스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도로변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몇 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버스에는 운전수를 보조하는 조수가 따랐다. 조수의 역할은 운행 중 버스 엔진이 꺼지면 손잡이 돌림기로 시동을 걸고, 승객들에게 요금을 받고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낙동강에 홍수가 날 때면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4시간 이상 걸리는 현풍까지 걸어서 가야 했다.

시골에서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학비도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 집은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슴을 여러 명 고용해서 농사를 지을 정도로 동네에서는 부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형들의 학비를 조달하느라고 논밭과 소 돼지까지 다 팔고, 남은 것이라곤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개똥논 밖에 없었다. 막내인 나에게까지 공부를 시킬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상태였지만 6개년 간 초등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나의 고집을 부모는 꺾지 못했다. 먹을 것만 보내주면 장학금을 타서 학교에 다니겠다고 각서를 쓰고 14살 소년은 무작정 대구로 나갔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리 많았던 아버지는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먹을 쌀을 짊어지고 함께 대구로 가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대구에 가보았지만 우연히 먼 친척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그 분이 자기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대구에 대한 상황을 설명해 주며 마침 자기 집에 빈 방이 하나 있다고 하면서 실비로 월세를 주었다. 이 집은 내가 다니기로 한 학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다니기에 편리한 거리였다. 낯선 대구에서 친척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하숙을 할 정도가 못 되는 형편이라 자취를 하기로 하고 그 집에서 짐을 풀었다. 자취생활을 할 때 연탄을 사용해서 난방을 하는데 연탄불에 꽁치를 구워 먹는 것이 최고의 반찬이었다. 고기 중에는 꽁치가 가장 싼 것이었지만 연탄불에 구운 꽁치보다 더 맛있는 반찬은 없었다. 학비와 용돈은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방값은 아버지가 보내주는 쌀로서 대신했다.
 
▲ 50년대 중반 대구 중앙로 / 현 YMCA 맞은편쪽에서 대구역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한번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어서 아버지와 나는 함께 쌀 한 포대를 짊어지고 대구로 가는 과정에 홍수를 만나 낙동강이 범람했다. 강물이 범람하니 길이 막혀 버스가 다니지 못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이방을 지나 구지까지 가서 혹시나 대구행 버스가 오지 않나 하고 기다렸지만 허탕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십Km나 되는 현풍까지 다시 걸어서 갔다. 현풍까지 가서야 비로소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게 오는 시골 버스라 초만원이었다. 버스운전수가 짐은 실을 수가 없다고 거절하는 것을 사정을 하여 쌀을 버스에 겨우 실을 수 가 있었다. 나를 공부시키기 위한 이러한 아버지의 열정에 감동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에 둘째누나 차정금이가 대구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김공희 매형이 대구로 전근을 오면서 누나도 함께 따라 온 것이었다. 혼자서 자취를 하다가 매형이 대구로 왔기 때문에 누나 집에서 함께 있기로 했다. 밥을 지어먹을 걱정이 없고 나보다 2살 위인 사형 김무희와 함께 공부를 하게 되니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김무희는 성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었다. 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공부도 배우고 있었다. 당시에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김무희를 따라서 교회에 나가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이것이 나중에 내가 영어를 잘 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전기사정이 좋지 않았다. 제한 송전을 하기 때문에 밤 12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전기가 끊어졌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열성에 전기가 나간 후에도 촛불을 켜놓고 공부를 했다. 졸음이 와서 꾸벅 졸다가 머리카락을 촛불에 태워먹은 경우도 있고 책을 태워버린 경우도 있었다. 졸음을 쫓기 위하여 찬물에 세수를 하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공부를 한 결과 중학에 이어 고등학교도 계속해서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덕실골이 대구생활권으로 바뀌면서 시골에서 대구로 이사를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산업화 현상에 따른 도시 집중화가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둘째 형 차기홍이도 대구로 이사를 왔다. 대구에 누나와 형도 함께 살게 되어 외로움이 덜해지는 분위기였다.

누나 집에 있다가 형 집으로 옮겨서 학교를 다녔다. 방학이 되면 조카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객지에서 공부를 하다가 고향으로 가면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다. 특히 고향에는 모두 친척벌이 되는 어른들이라 인사를 하지 않으면 버릇없이 자랐다고 욕을 먹게 되는 분위기였다.

대구는 사과가 유명했기 때문에 고향에 갈 때에는 사과 한 꾸러미를 사가지고 갔다.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맨손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과와 담배 한 갑씩을 들고 다니며 인사를 하면 시골어른들이 대단히 기뻐했다. 이러한 습관이 나에게는 하나의 실천하는 도덕 교육도장이 되기도 했다.

한번은 다섯 살 된 조카 차석진을 자전거에 태우고 대구에서 덕실골까지 갔다. 자전거도 형이 사업용으로 사용하던 바퀴가 큰 화물용이었다. 버스비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이용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짐자전거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먼 거리를 달려서 고향에 도착하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깜짝 놀랬다. 그래도 방학이 되어 고향에서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대구로 떠나 올 때는 부모와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을 한없이 흘리기도 했다.

큰형 차기환도 대구로 이사를 왔다. 이제 대구에는 우리 가족들이 모여 사는 근거지가 되었다. 부모님만 제외하고 모두 대구로 나왔던 것이다. 큰형이 나에게 자장면을 사준 일이 있었다. 대구에는 내가 제일 먼저 나와 있었지만 돈을 아끼느라고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형이 사준 자장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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