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천변의 샛별 (12화)
  제2장 객지의 청소년

덕실골 촌놈이 대구에 나와서 어느 학교에 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고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구에서 제일 명성이 있는 경북중학교에 원서를 내었다. 당시 경북중학교는 공립이었기 때문에 시험을 보지 않고 초등학교 내신성적만으로 뽑았다. 합천 덕곡초등학교에서 6개년간 우등과 개근을 한 최고의 성적이었지만 시골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불합격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식 입학시험을 치렀다면 자신이 있었지만 아직 한 사람도 경북중학교에 들어간 실적이 없는 시골학교라 경북중학교에서는 덕곡초등학교의 수재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경북중학교에서 낙방을 했기 때문에 2차인 대륜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사립학교인 대륜중학교는 필기시험을 보았다. 시험을 보게 되니 당연히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대륜중학교 창설이래 최고의 성적을 얻어 당당히 수석합격을 했던 것이었다.

대륜중학은 대구 수성천 벌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성천의 매서운 바람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추위였다. 대구는 분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전국에서 가장 춥고 여름에는 가장 더운 지방이다. 학교 옆 나의 자취방에는 연탄불을 피워놓았지만 혹한의 추위에는 방안의 물이 꽁꽁 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손발을 비비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수석으로 입학한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륜학교는 일제시대였던 1921년 9월 15일 애국지사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세운 순수 민족사학이다. 일제시대 일본의 교육방침은 그들의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민족교육이란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참된 한국인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 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사학을 설립했던 것이다. 이렇게 설립된 대륜은 초기에는 교남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운기가 교장이 되어 출발을 했다. 1940년 10월 30일 서병조 재단이사장이 취임하면서 대륜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민족의 독립을 촉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명문학교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수성동에 있는 학교를 군대에 넘겨주고 대봉동에 있는 가교사로 이전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휴전이 된 후 1954년 10월 4일에는 미군에게 빌려준 교사와 교지 일부를 환수 받았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태 하에서 일부 교사만을 사용했고, 운동장도 제한된 상태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륜학교는 나의 인생에 가장 보람된 도장이었고 나의 인생관을 형성시켜준 향도였다. 민족과 국가의 샛별이 되기 위해서도 향학열에 불타는 모범학생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경상북도 교육감상과 함께 시계, 사전 등 많은 부상을 수상했다. 중학교 졸업식에는 고향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오고, 둘째 형 차기홍, 둘째 누나 차정금, 사형 박동규까지 참석하여 축하를 해 주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대륜중 최우수상 수상, 내 앞에 시계와 상장이 보인다 / 뒷줄 왼쪽부터 차기홍, 김기보, 차정금, 박동규, 앞줄 왼쪽부터 어머니, 필자, 아버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알려진 경북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려고 했다. 특히 내신성적 제도 때문에 경북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도 경북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진학원서를 내기 위하여 담임선생과 상의를 하니 담임선생은 나를 교장실로 데리고 갔다. 교장선생은 나에게 대륜고등학교에 계속 다닌다면 3년간 장학생으로 보장해 주겠으니 대륜에 진학을 하라고 반 강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교장선생은 우수한 학생을 대륜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이 학교를 발전시키는데 밑거름이 된다고 보고 수석으로 졸업한 나를 동일계열 고등학교에 반드시 넣겠다는 것이었다. 분위기로 보아서 도저히 다른 학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담임선생과 교장선생의 강력한 설득에 나는 대륜이라는 모교에 대한 애정도 있고 하여 결국 대륜고등학교에 가기로 했다. 고등학교 진학시험도 생략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서 부모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가 신학기가 되어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다.

경북대학교 물리과대학 학장이었던 이효상 선생이 교장서리로 부임을 했다. 인품이나 능력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효상 선생을 만나 나의 인생관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특히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인상 깊은 강의를 많이 해주었다. “스스로 속이지 말자”, “남을 사랑하자”라는 주제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 두 말은 곧 대륜학교의 교훈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륜인의 혼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자”라는 말 속에 인생의 지표가 내포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 한줌 부끄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남을 사랑하자”라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회야 말로 지상낙원의 유토피아적인 세상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우리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사회를 위하는 길인 것이다.

한솔 이효상 선생은 1930년 일본 동경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1936년 “가톨릭청년”지에 “기적”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등단한 후 많은 작품, 특히 문학과 관련된 연구논문 등을 발표한 시인이었다.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투신하여 6, 7대 국회의원,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이효상 선생은 우리 자치위원들을 앞산 밑에 있는 당신의 과수원으로 불러서 학교운영에 대한 지침을 내리고 우리들에게 인생관과 국가관에 대한 설교를 해준 인자한 선생님이었다.

대륜의 로고도 이때 만들어 졌다. 미술시간에 박명조 선생이 새로운 대륜 모표(帽標)를 그려오도록 숙제를 내었다. 숙제를 하면서 우리들이 선생님과 함께 토의를 거쳐 만든 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륜 로고가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만들어진 교훈과 로고 때문에 대륜인으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가지고 있다. 대륜인의 긍지를 가지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 부르던 노래가 교가였다.

 태백산이 높솟고 낙동강 내다른 곳에
 오는 세기 앞잡이들 손에 손을 잡았다.
 높은 내 이상 굳은 나의 의~ 지~ 로
 나가자 나 아~가~ 예서 얻은 빛으로
 삼천리 골 곳에 샛별이 되~~어라

이상화 작사, 김호룡 작곡인 교가를 목이 터지라 함께 부르며 수성벌판에서 땀을 흘리며 심신을 수련하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는 세기의 선봉이 되는 샛별이 되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우리는 굳게 했던 것이다.

나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화학과 생물학을 담당하고 있는 이만정, 장기진 선생과 함께 과학분야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모여 과학연구동아리를 만들었다. 이 동아리에는 김동성, 전상열이 함께 했다. 우리 3명을 학교에서는 과학 3총사라고 불렀다. 김동성은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고, 전상열은 전기회사 사장이 되었다.

1961년 가을에는 경복궁에서 전국과학전시회가 있었다. 우리 과학동아리 삼총사는 함께 연구한 “클로렐라”라는 작품을 가지고 전국과학전시회에 출품을 하여 창의적인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으면서 큰 인기를 얻고 우수상을 수상했다. 과학전시회가 끝난 후에는 경복궁에서 동대문까지 교가를 부르며 걸어 다녔다. 서울시가지를 답사하면서 대륜의 호연지기를 마음껏 펼쳤던 것이다.

그 후 대륜학교는 나날이 번창하여 대구에서 가장 좋은 시설과 가장 좋은 위치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대구 수성구가 서울 강남같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대구의 8학군이 되었고 동창 중에 건설업을 하는 독지가가 나타나 학교시설을 현대화하였다. 경북, 대구지역에서 서울대학교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고 수능시험에서 수석합격자를 연속으로 내고 있는 전국최고의 명문학교로 우뚝 서게 되어 대륜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크게 가지게 되었다.

 
  덕실골에서 대구로 (11화)
  양키시장의 똥구두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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