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륜학교에 다닐 때 나는 “양키시장”에서 판매하는 헌 군화를 구입해서 신고 다녔다. 헌 군화는 질기고 손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신발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나의 별명을 “똥구두”라고 지어줄 정도로 6년간 무거운 헌 군화를 끌고 다녔던 것이다. 친구들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똥구두! 똥구두!”하면서 놀리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동창회 모임에 나가면 그때의 “똥구두”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당시에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잿더미가 되어 어렵게 살던 시대라 시장에는 군수물자가 많이 나돌았다. 특히 대구역전 골목에 가면 미제물건을 비롯하여 군용물자가 없는 것이 없었다. 이곳을 사람들은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다. 전쟁 중 시체에서 벗겨온 군화, 군복, 반합 등 질기고 튼튼한 중고 군수제품을 아주 헐값에 살 수 있었다. 군화뿐 아니라 헌 군복도 구입해서 검정색으로 염색을 하여 입으면 옷 한 벌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내구성이 강하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값싼 헌 군용물자를 학창시절부터 애용한 것이 내가 군인의 길로 가는데 일조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항상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교과서는 새 것을 사용해 본적이 없었다. 대구 양키시장 골목과 반월당에 나가면 중고 교과서를 파는 곳이 많았는데 항상 헌책방을 찾아다니면서 중고서적을 구입해서 공부를 했다.
신학기가 되면 가난한 학생들은 선배들이 물려준 책이 아니면 헌책을 구하기 위하여 저자, 출판사, 출판연도를 메모해서 양키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어쩌다가 내가 찾는 책을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발견하게 되면 보물을 찾은 듯 기뻐했다. 이러한 헌책을 구입해서 해묵은 캘린더를 뜯어 책 커버를 만들고 매직펜으로 책 표지를 쓰고 나면 한 학기 공부준비가 끝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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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륜고 시절 / 맨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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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헌군화, 헌옷, 헌책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얻은 반갑지 않은 선물이 있었다. 중고제품을 통하여 옮겨진 폐결핵이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건강검진을 했는데 결핵판정을 받았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잘 먹지도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고제품만 사용하는 과정에서 결핵이 나의 몸으로 전염되었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보건소를 알려주어 대구 수성동에 있는 보건소를 찾았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결핵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서 결핵약을 많이 보내주었다. 보건소에서는 X‐Ray를 찍고 건강검진을 한 후 “파스짓”이라는 결핵약을 무료로 주었다.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어머니는 평소 나에게 잘 먹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온갖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주었다. 특히 결핵에 좋다고 하는 개를 잡아서 개장국을 매일 끓여주었는데 내가 보신탕을 먹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보건소 약과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돌봄으로 폐결핵은 깨끗이 완치되었다. 그러나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하는데 항상 흉부 X‐Ray촬영에서 흉터가 나타났다.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2차 정밀검사를 받은 후 이상이 없다는 최종판결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기도 했다.
결핵이 완치된 후 대구 동인동에 위치하고 있는 육영기숙사에 들어갔다. 독지가가 일제시대 적산가옥을 정부로부터 임대해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자선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하던 자취생활을 접고 육영기숙사에 들어가서 송대헌 선배를 만났다. 나보다 2살 위인 대륜학교 송선배는 나를 친동생같이 아껴주었다. 나중에 그 선배는 육사 22기로 들어가서 대령으로 전역을 했지만 나의 은인이요, 내 인생진로의 지표가 되어주었다.
육영기숙사는 각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우등생들만 추천을 받아서 입사를 시켰기 때문에 모두가 공부를 잘 하고 모범생들이었다. 자취생활을 하는 것보다 생활비도 적게 들고 공부하는 분위기도 좋았다. 기숙사 원장은 연세가 많은 인자한 분으로 우리들을 항상 바른길로 가도록 인생설교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불편함이 없도록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원장에게는 고명딸이 하나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그녀의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들으면 공부보다는 그녀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사춘기가 왔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그림의 떡이었다. 사관학교를 들어가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는 다른 생각을 실천에 옮길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기숙사 옆에는 빵집이 하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찬물에 세수를 하고 공부를 할 때면 빵 굽는 냄새가 내방까지 확산되어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꼬르륵 하는 배를 움켜잡고 빵 하나만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비가 빠듯한 나에게는 그 먹고 싶었던 빵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하고 기숙사 생활을 마쳐야만 했다.
이때 나는 대륜학교 뿐만 아니라 로터리클럽에서도 장학금을 지급받았다. 대구 교육청에서 공부를 잘 하고 모범된 학생을 뽑아서 로터리클럽 장학생으로 추천했던 것이었다. 로터리클럽 조찬회에 나가서 장학금을 받는데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은 모두 머리가 하얀 중년 신사분들이었다. 유명인사들을 초청해서 조찬강연을 듣고 있는 그 분들은 인품이 고매한 지식인들이었다. 나도 나중에 이런 분들같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귀중한 장학금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