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실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화)
  제1장 덕실골과 유년기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내 고향 덕실골!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면 낙동강변 밤마리 나루터에 닿는다. 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나룻배에 몸을 싣고 뱃사공이 물살을 가르면서 노를 저으면 저쪽 강변에서 마중 나온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정해진 뱃삯은 없다. 배를 탈 때 마다 현찰을 주는 것이 아니다. 여름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나락 한 말씩 1년에 2번에 걸쳐 뱃삯으로 곡식을 준다. 10번을 타든 100번을 타든 상관없으며 알곡으로 뱃삯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덕실골 밤마리 나루터는 낙동강 원류와 또 다른 지류인 회천이 합류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심이 깊어 포구가 형성되는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조건에 따라 5일장이 크게 열리면서 각종 물류의 교류장소가 되었다. 5일장은 밤마리장, 이방장, 구지장, 현풍장, 초개장, 그리고 고령장 등이 있었다. 모두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발달된 5일장이었다. 특히 밤마리장은 조선시대에 가장 번창한 5일장 중의 하나였다. 그 시대에 밤마리 나루터는 낙동강 수로를 따라 인원과 화물을 수송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많은 한량들이 오가는 유흥 강변항구로서의 구실을 했다.

장날에는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일 뿐만 아니라 팔도의 각설이들이 다 집결하였고, 농악대회, 씨름대회와 오광대놀이도 함께 성행했다. 오광대의 유래는 내 고향 밤마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래 전 산 너머 초계에 “말뚝이”라는 마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성이 박가로 원래는 양반이었으나 하인 노릇을 하며 지냈다.
 
덕실골에는 양반이 억세어 상민이나 하인을 천대 또는 무시하였다. 이에 화가 난 말뚝이가 양반의 내정을 알아내어 그 추행을 촌민 1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폭로했다. 그때 제 얼굴을 나타내는 날이면 양반들로부터 경을 치게 되니 탈을 쓰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밤마리 오광대놀이의 시초가 된 것이다.

낙동강변 밤마리에서 다시 4Km정도 시골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복사꽃이 만발하고 농부들이 한가롭게 소를 몰며 노고지리 지저귀는 아름다운 두메산골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덕실골이다.

지금은 낙동강에 교량이 건설되고 포장된 도로가 잘 정비되어 대구에서 30분 거리밖에 되지 않은 도시근교로 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덕실골은 한가롭고 평화로운 두메산골이었다. 남쪽으로는 다남산(378m), 북쪽으로는 소학산(489m)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어 천국이 따로 없는 명당이다.
 
봄에는 앞산의 진달래가 빨갛게 물들어 온통 붉은 색깔을 칠해 놓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름이면 앞개울에 나가 멱을 감는 개구쟁이들의 물장구 소리가 평화로운 운치를 더해주었다.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벌판을 이루는 가을이 되면 지나가는 바람결에 춤추는 허수아비에 놀라 달아나는 참새떼를 바라보는 농부들의 행복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이면 화롯불가에 모여 앉아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곳이 덕실골이었다.

덕실골이 덕곡면 장리로 개명되었지만 오래 전부터 다른 마을로 시집가는 새댁을 덕실댁이라고 부르는 덕이 많고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대구에서 가깝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구로 드나들면서 공부를 하고 거래를 하며 친인척을 두고 있다.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위치했던 부산은 낙동강 수로가 주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왕래가 많았다. 그러나 육로가 주요 통행수단으로 전환되면서 부산이나 마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구를 선호하고 있다. 형들과 누나들은 부산에서 공부를 한 반면에 막내인 나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던 배경도 교통수단의 변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덕실골에서 나는 1944년 8월 4일(음력 윤4월 17일) 농사를 짓던 차경봉과 전순선 사이에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일본제국주의 망령들이 우리들의 말과 글을 빼앗아 초등학교에서부터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노래를 부르도록 했던 시기였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제국주의 일본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임의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학도병에 강제로 입대하는 규정을 만들어 꽃다운 젊은이들을 전장의 총알받이로 삼았다. 보국정신대라는 것을 결성하여 미혼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서 제국주의 군대의 성적 노리개로 삼고 있었던 시대였다.
 
▲ 덕곡초교 (1956년 3월 1일) 2번째 줄 우에서 4번째가 나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연안 차씨 41대손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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