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과 유년기_1 (7화)
  제1장 덕실골과 유년기

덕실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던 내가 만 여섯 살 되던 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T‐34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불법으로 남침을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주말이라 국군장병들은 모두 외출 외박을 나가고, 용산에 위치했던 육군본부에서는 장군들이 부부동반으로 무도회를 열고 있었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국군은 일요일 아침 방송을 통하여 휴가 외출 나간 장병들을 소집했다. 아침에 일어나 라디오를 켜니까 아나운서의 황급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38선에서 북한 괴뢰군이 불법남침을 하였습니다!"
"국군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라! 부대로 복귀하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전군비상령이 선포되고 휴가 외출 나왔던 이웃집 군인아저씨들은 급히 부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했지만 무엇인가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용맹한 우리 국군은 문산 지역에서 육탄으로 적 탱크를 깨부수고 북진하고 있습니다."
"옹진에서는 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계속 북진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입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으로 진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디오방송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허위사실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거짓 사실을 방송함으로써 많은 서울시민들이 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치하에서 온갖 고충을 당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전쟁개시 3일 만에 서울 미아리를 점령했다. 한국군은 전차라곤 한대도 없었다. 아무리 M1소총을 쏘아도 북한군 전차는 괴물처럼 계속 굴러 내려오니 한국군은 도저히 전차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어 수류탄을 들고 전차 위에 올라가서 전차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적 전차 속에 집어넣은 후 자폭하는 육탄용사까지 나오기도 했다.

전차를 몰고 계속 남진을 하니까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 경기도 시흥으로 육군본부를 옮겼다. 한강다리가 폭파되니 한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서 다리를 건너지도 못하고 괴멸이 되었다. 이때 서울시민이 150만이었는데 100만은 피난을 했고, 50만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하면서 서울이 다시 수복될 때까지 공산치하에서 온갖 곤혹을 다 겪었다.

한강 다리가 폭파된 후 일본 동경에 있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경비행기로 수원비행장에 내려 한강 남쪽강변을 시찰했다. 한국군만으로는 도저히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트루만 미국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즉각 한국전선으로 투입할 것을 건의했다.
 
▲ 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1950. 6.29.)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미주리주 고향집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즉각 워싱톤으로 돌아갔다.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한 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된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한국전선으로 즉각 투입하게 하고 미 본토 미군을 한국으로 투입할 것을 결심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전쟁 상황에 대한 뉴스가 계속되었다.

"미군이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맥아더 장군이 한강을 시찰하고 유엔군도 우리나라에 곧 들어올 것입니다."

미국이 유엔에 한국전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유엔은 공산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1950년 6월 28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유엔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유엔 16개국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그 국가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네덜란드, 필리핀, 터키,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등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은 미국에게 유엔군사령관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미국은 이 요청에 따라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즉각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미8군사령관에 임명하고 한국전에서 지상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후에 워커 장군은 의정부전투에서 전사를 하였으며, 서울에 있는 워커힐 호텔은 이 워커 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지휘통일의 원칙에 따라 유엔 참전 16개국 군대를 작전통제하고 있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도 넘겨주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비롯하여 전 유엔군을 지휘하게 된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있던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1950년 7월에 오산에 투입했지만 기세등등하게 내려오는 북한군의 전차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뒤를 이어 미 제24사단 본대가 도착했지만 대전 금강 방어선에서 무너지고, 미 제24사단장인 딘(William F. Dean) 장군까지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계속해서 남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1950년 8월 초순 낙동강 선에 이르렀으며 낙동강변에 위치한 덕실골 나의 고향에도 북한군이 들어 닥쳤다. 고등학생이었던 형들이 여름방학기간이라 집에 와있었다. 오래간만에 집에 온 형들은 나를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멱을 감으면서 메기와 미꾸라지를 잡고 있었다. 북한군 선발대로 보이는 군인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흙투성이 군복에 나무 잎사귀로 위장을 한 북한군인들이었다. 따발총과 장총을 어깨에 멘 사람이 평양사투리로 물었다.

"낙동강이 어디 메야?"
"저 쪽으로 가면 됩니다."
"경찰들은 언제 어디로 갔습네?"
"모르겠습니다."
"국방군들이 어디 있는 줄 아느메?"
"모르겠습니다."
"이 깐나 새끼들 아무것도 모르는 기먼!"

조금 있으니까 북쪽과 서쪽 산등성이에서 수많은 북한군들이 줄을 지어 내려와서 낙동강 쪽으로 몰려갔다. 이 당시 덕실골로 들어온 북한군은 제1군단 소속 제4사단 병력이었다. 이권무 소장이 지휘하는 제4사단은 서울을 제일 먼저 점령했다고 하여 일명 서울사단이라고도 불렸다. 제4사단에는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할 때 참전했던 조선족 8로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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