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씨 문중의 장손으로 혈통을 이어받은 아버지 차경봉은 일제가 한국을 합방하던 해인 1910년 9월 23일 할아버지 차수형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할머니가 딸만 4명을 계속 낳다가 마지막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독자로서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귀한 옥동자로 태어나서 주위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조금은 이기주의적이고 고집이 셌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리더십이 있었다.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유교사상에 투철한 분으로써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우람찬 목소리와 눈빛으로 가족들과 머슴들을 다스리는 엄한 가장이었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일을 맡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던 촌장 어른이었다.
덕실골 사람들은 농사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80%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우리 집은 머슴을 둘씩 데리고 농사를 지을 정도로 동네에서는 비교적 잘 사는 층에 속했다. 마을이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우리 집만 기와집 지붕을 하고 있었다. 초가집 지붕가장자리에는 참새들이 집을 지었다. 동네아이들이 자기 집 지붕에서 새알을 발견했다고 자랑할 때면 초가집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외동아들인 아버지 위로 고모들이 많이 있지만 특별히 우리 집과 가깝게 지내던 고모는 건넛마을 양촌에 사는 막내고모와 산 너머 율곡에 사는 큰 고모였다. 고모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올 때면 잔치분위기가 되었다. 닭을 잡고 소중히 간직해 둔 간고등어가 밥상에 올랐다. 우리 집 화단에는 봉숭아, 채송화, 민들레 등 온갖 꽃들이 일년 내내 피었다. 내 또래의 고종 4촌 누나들 중에 옥선이와 분선이는 특별히 나와 친했다. 꽃밭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누나들의 치마를 들어 올리며 놀려주던 장난이 가장 즐거웠다.
율곡 고모집은 황강변에 있었기 때문에 수박과 참외 등을 많이 심었다. 원두막에 나가 매미소리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수박을 깨어먹는 즐거움 때문에 고모집에 자주 갔다. 고모는 인정이 많아 우리들이 가면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과일과 엿, 식혜 등 온갖 음식을 다 내놓았다. 이러한 사랑과 정다운 낭만이 나의 건전한 인격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매사 불여(不如)튼튼”을 가훈으로 삼고 자식들에게 항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라고 강조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는 성경말씀과 같이 자식들에게 아무리 작은 일에도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했다. 호랑이도 토끼를 잡을 때에는 온 힘을 다한다고 한다. 가훈으로 내려온 “매사 불여튼튼”은 작은 일까지도 실수를 하지 않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습성을 가질 수 있게 하여 훗날 나의 인생에 큰 지침이 되었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시골에서 도시로 자식을 보내어 공부를 시키는 일이 흔하지 않았지만 우리 형제들은 부산과 대구로 나가서 유학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소와 돼지를 팔고 이것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논과 밭까지 내다 팔면서 공부를 시켰다. 아버지는 외동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조부모는 아들이 멀리 집을 떠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만주나 일본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객지에서 견문을 넓히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이 대단히 부러웠던 것이다. 당신이 하지 못한 넓은 세상에서의 경험을 자식들에게는 반드시 시켜보고자 자식들을 부산과 대구로 내보내어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일하는 소가 필요했다. 농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소가 농사일의 대부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집마다 소가 없는 집이 없었다. 우리 집에는 검은 점이 박힌 얼룩소가 있었는데 이 소를 보살피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형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부를 하기 위하여 객지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집에는 막내인 나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윤길아! 어서 일어나 소 여물을 끓여야지!!"
"네! 아버지!"
나의 아명은 윤길이었다. 윤달에 태어났다고 하여 큰 누나가 지어준 어릴 때 이름이었다. 창 밖은 아직 컴컴한데 새벽잠이 없는 아버지는 한창 잠이 많은 나를 큰 소리로 깨웠다. 그러나 나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벌떡 일어나 사랑채에 있는 가마솥으로 가서 솔가지를 꺾어 불을 지피면서 소여물을 끓였다. 꽁꽁 언 아궁이 바닥에 불을 지피고 여물을 가마솥에 넣어 끌인 후 소에게 먹이면 소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워낭소리를 울리면서 논밭 일을 도맡아 하는 얼룩소는 새끼도 잘 낳았다.
소여물을 끓이는 장작불은 동네어른들이 모이는 사랑방의 주요 난방수단이기도 했다. 사랑방 손님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화롯불을 준비하고, 목이 마를 때 동네 어른들이 마실 수 있도록 큰 양푼이에 물을 떠다 놓는 일도 빠질 수 없는 나의 일이었다. 이러한 성실한 행동에 동네 사람들은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하루의 농사일이 끝나고 저녁때가 되면 우리 집 사랑방에는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사랑방은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휴식처요 토론장소였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마을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토론을 벌이는 포럼광장이었던 것이다. 겨울이면 눈이 쌓인 산 속에서 노루와 토끼를 잡아와서 요리를 해먹기도 했다. 사랑방 벽지를 보면 사람들이 앉은 자리 뒤에 머리자국이 까맣게 나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머리를 벽에 기대고 앉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머리때가 벽지에 묻었던 것이다.
동네 어느 집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돼지를 잡았다. 큰 잔치 날이 있을 때에는 소를 잡기도 했다. 때로는 동네 사람들이 어울려서 집집마다 고기를 나누어 갖기로 약속하고 돈을 미리 거두어 소나 돼지를 잡았다. 사랑방 회식거리를 챙기는 기회도 이때이었다. 사랑방에서 냉동되지 않은 고기를 바로 요리해서 먹는 맛이야 말로 진정한 고기 맛이었다. 금방 잡은 소나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사랑방을 개방해서 동네 토론방을 만들고 마을의 궂은일은 솔선수범해서 맡아 했던 아버지는 통솔력이 있고 모범된 어른으로 널리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의 추대로 오랫동안 촌장역할을 하면서 동네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 내가 덕곡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로 공부를 하러 나갈 때 아버지는 쌀을 등에 짊어지고 대구까지 나를 데리고 나갔다. 어린 나를 대구에 내려놓고 자치생활을 하도록 한 것이 가련하게 보였든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자상한 모습은 엄한 촌장이 아니라 사랑과 정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막내인 나에게 특별히 정이 많았던 아버지는 73세에 노환으로 고향집에서 돌아갔다. 군무에 매인 몸이라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평생 후회가 되었다. 내가 해외 출장 중일 때 1982년 6월 10일(음력)에 돌아가신 것이다.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면서 강영식 장군과 함께 일본,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을 순방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만해도 동남아시아지역으로 통신이 잘 연결되지 않았고, 한국으로 오는 항공편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오는데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리 빠른 항공기를 타고와도 3일장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차기환 큰형은 내가 와야만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5일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무더운 삼복더위라 온 식구들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냉동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 시골이라 온 집안이 냄새로 가득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밤새도록 울면서 불효자식의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눈이 퉁퉁 부운 상태로 정신을 차려보니 큰형 차기환이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아버지가 임종 시에 나를 많이 찾았다고 했다. 해외출장 중 아버지가 원하던 가방을 사왔는데 그것도 드릴 수가 없었다. 평소 아버지는 초코파이를 좋아했다. 당신이 좋아하던 초코파이를 가방에 넣어와서 마음껏 드시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