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공학과에서 1년 반 남짓 수강하고 그 이상 계속할 의지가 없어 마침내 1958년 봄에 군에 자원입대하고 말았다. 당시 일반인들은 3년 동안 군에 복무하게 되어 있었고 대학생들은 ‘학보’라는 이름으로 18개월만 복무하는 혜택이 있었다.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군복무까지 오래 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자 정부에서는 학보출신 사병들은 전부 일선에 근무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학보 제2기로 군에 입대한 나의 주위를 살펴보니 높은 사람들의 아들들은 대부분 큰 도시의 후방부대에 배치되었고, 나와 같은 가난한 농촌출신들만 일선에 배치되었다.
군 제대를 앞두고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결심
이 같은 소식을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고 확인했을 때, 나의 작은 결의는 더욱 굳어졌다. 일 년 반 동안 최전방 경계근무를 하면서도 항상 나의 마음속에는 온통 큰 꿈을 이루어야 갈등과 부조리를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의식을 지배하였다. 결국 제대 몇 개월 전에 경제학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 전에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고급 공무원이 되기로 나의 꿈을 제법 구체화하였다.
나는 4‧19혁명이 발생했던 1960년 2월에 제대하고 대학에 복교했다. 대학생들이 주도했다고 해서 4‧19학생운동이라고 평가받은 이 혁명은,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 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자행한 3‧15부정선거 때문에 발생하게 되었다.
나는 1년 반 동안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막 제대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등록금의 절반을 내게 되었고,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상황으로 한 학기를 휴학하게 되었다. 군복무를 1년이든 2년으로 했으면 등록금 절반을 내고 한 학기 휴학할 필요가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이러한 혜택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과목도 택하지 않는데 등록금 절반을 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처사임에 틀림이 없다.
더욱이 매사 부정적 사고 를 지닌 나에게 있어 이 당시, 전공 외에 이와 같은 이유로 불만도 많았고 또 시간도 많아서 그해 3월 15일 이후 거행된 부정선거를 규탄 하는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이때는 대학 총학생회 주관의 반정부데모뿐만 아니라, 단과대학별 부정선거 성토대회, 교내시위 등으로 하루도 대학 캠퍼스나 도시의 공간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나는 이공대 소속이었지만 모든 단과대학의 반정부 교내외 행사에 참석하느라고 매일 분주한 날을 보냈다.
화사했던 봄날, 자유당 독재와 3‧15부정선거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청와대로 질풍처럼 돌진했던 4‧19는 반세기가 넘어 지금은 꿈결처럼 아득한 옛 얘기가 되었다. 오전 11쯤 전교생이 신축한 강당 앞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다짐하고 백양로를 따라 앞으로 거센 물결처럼 도도하게 돌진했다. 내가 데모의 주동자나 된 것처럼 앞장을 서서 구호를 외치며 신촌 로터리로 달려 나갔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목은 노도처럼 밀려오는 성난 군중으로 완전히 막혀서 연세대 데모대는 외곽을 한 바퀴 돌아 오후 1시경에 안국동을 거쳐 정부청사가 있는 중앙청까지 진출했다. 이때 경찰들이 연세대 데모대에 발포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아비규환의 장으로 돌변했다. 얼마 동안은 학생들은 구호와 함성을 질렀고 경찰은 총을 마구 쏘아대는 피아간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총격도 점차 가라앉았고 지칠 대로 지친 학생들도 더는 진출이 불가능해지자 서서히 돌아서기 시작했다. 나도 데모대에서 이탈해서 아현동에 있는 하숙집으로 향했다. 모든 교통이 두절되고 하숙집까지 걸어야 했기 때문에 땅거미가 짙어져 어둑어둑할 때야 하숙집에 도착 했다. 오는데 얼마나 많은 최루탄 가스를 마셨는지, 며칠 앓아누워야 했다.
4‧19 이후부터는 데모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학장, 교무처장실을 다시 찾아가면서 전과를 강하게 요청했다. 4‧19 전까지만 해도 재학생 신분으로 학장이나 교무처장을 만나는 것이 요즘의 총장을 만나는 것처럼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4‧19 이후에는 그나마 학생들의 발언권이 다소 강해져서 학장과 처장을 만나기 쉬웠고 또 전과는 달리 학교의 학칙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몸을 낮추는 변화의 물결이 점차 밀려왔다.
이른바 4‧19 세대인 나에게 4‧19는 다른 대학생들처럼 순백의 백합처럼 순수한 결정체는 아니었기에 뒷날 죄책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전과를 위해 연세대에서 숭실대학으로
연세대에서는 전과가 불가능한 것을 확인한 나는 5월부터 여러 대학의 교무처에 면담을 하던 끝에 결국 1960년 가을에 숭실대학교 경제학과로 편입하여 전과를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늦게야 알게 된 형은 동생의 편입전과를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참고 세칭 일류대학을 나왔어야지 타 대학으로 옮기면 너의 장래에 지장이 있지 않겠느냐며 크게 심려하던 큰형의 모습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가 연세대학에서 숭실대학에 편입한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형뿐이 아니다. 친구들이나 선후배들로부터도 왜 좀 더 좋은 대학에 편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 사실은 다른 대학으로 전학하기로 결정한 이후 그 당시 숭실대학보다 좋다는 대학은 다 가보았지만 금년에는 편입생을 받지 않는다는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숭실대학에 편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대학에 편입했어도 다음에 얘기할 병에 걸렸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으면 수술을 받지 못해 죽었거나 결국 수술에 했 다 하더라도 너무 늦어서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