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9화)

숭실대학 경제학과에 편입과 전과를 하고 나서야 대학에 입학한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희망과 비전으로 활력이 넘쳐나는 대학시절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공과목을 열심히 이수해서 나의 꿈인 행정고시를 보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큰사람이 되어보겠다는 포부를 나 자신에게 여러 번 다짐하였다. 비교적 첫 학기는 강의도 재미있었고 학업에도 몰두해서 비교적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재학 중에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와서 몇 주일씩 지내곤 했었다. 1962년 겨울방학 때도 고향에 내려와서 몇 주일 머물다 상경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몸이 붓고 대변에서 피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개인병원에서 완치할 수 없는 치질에 걸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본 결과 몸 안으로 자라나는 치질에 걸렸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퇴원할 때 앞으로 재발하지 않겠느냐는 형의 질문에 수술을 담당한 의사는 치질수술은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서울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며 따뜻한 격려도 서슴지 않았다.

그 후에 놀랍게도 상황은 돌변해서 상경한 지 몇 주가 안 되어 대변에서 또다시 피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개인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치질이 재발했다는 것이다. 다시 수술을 받았지만 몇 주 있다가 또다시 재발했다. 이처럼 3학년 내내 수술, 재발의 악순환을 거듭 하였고, 안타깝게도 학교공부도 제대로 못 하는 형편에 처하고 말았다.

치질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이 다행히 나의 치질은 암은 아니라고 했지만, 수술재발의 악순환과 나날이 허약해가는 심신과 점차로 멀어져가는 나의 집념, 그리고 자포자기의 심적 고뇌로 나는 밤낮을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내 얘기를 자세히 듣고 수술흉터 등을 검진한 한 의사가 개인병원에서는 완치시킬 수 있는 치질이 아니니, 큰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 당시 서울역 맞은편에 있었던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상의했더니 치질이 너무 악화되어 수술도 간단하지 않고 몸도 너무 약해져서 얼마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하기에 병원비 부담이 클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병이 발생하기 전에 50kg이었던 체중은 1년 사이에 30kg 이하로 줄어들었고 신경성위궤양 증세로 식사 때마다 많은 양의 소화제를 복용해야 했다. 가정의 경제사정이 원래 넉넉하지 못한 농촌이어서, 소와 땅을 팔아서 겨우 공부를 했는데, 잘못 선 빚보증 탓에 가정형편이 심하게 기울어지기 직전이어서 부모님은 치료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고민 끝에 그 사실을 적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의 학비를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큰형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큰형은 며칠 후에 한의사와 함께 상경해서 진찰을 하였다. 그 한의사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 1960년 서울역 / 나는 방학 중에는 고향에서 지내고 서울에 올라오곤 했다

‘불치병-죽음?’ 절망감에 사로잡힌 우리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팔자소관이라고 체념을 한 뒤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몸에서 피고름은 계속 흘러나오고, 수술할 돈은 없고, 그리고 지칠 대로 지친 심신에 그저 눈앞은 캄캄해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면 기숙사 뒤편의 산자락에 올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몇 번인가 자살을 떠올리기도 하였지만, 불현듯 6남매의 막내인 나를 퍽이나 사랑해주셨던 어머니의 유언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며 떠올라 감정 을 절제하였다.

운명하기 며칠 전에 내 손을 힘없이 잡고 “내가 저 세상에 가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너는 꼭 큰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준 유언의 전부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안은 3대가 함께 살아서 대가족이었지만 막상 어머니 임종을 지켜본 것은 불행하게도 어린 나였다.

그 당시 어머니의 임종을 앞에 둔 나의 비통함은 온통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나의 친척 어른들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나를 만나면 가끔 그때의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자살까지 생각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깨달아

이 일로 인해서 나는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산이나, 명예, 권력 등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부모가 주신 생명은 딱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지대한 불효다. 더욱이 종교계에서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이 인간에게 생명을 빌려준 것이기에 별처럼 존귀한 자존감을 포기한 자살은 교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자살은 단순히 한 인간에게 국한한 죄악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 사람들에게 사회나 국가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주면 자살률은 감소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상대방의 명예와 자존심을 깎아내려 자살로 내모는 비정한 사회야말로 진짜 죄인이다.

또한 우울증 환자를 정신병 환자로 보지 말고 나도 언젠가는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걸릴 수 있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격려해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부끄럽게도 OECD 국가 중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