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직업을 탄생시킨 세브란스...

그 당시 형은 친구의 빚보증을 섰다가 친구의 빚을 대신 갚는 처지여서 가정형편은 심히 어려웠기에, 내가 고학을 하든지 아니면 휴학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런 까닭에 내 사정을 형에게 얘기할 용기도 없었고 해봐야 병원비를 지불할 형편이 못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무료로 수술을 간청하기 위해 숭실대학 기숙사에서 세브란스병원까지 수없이 찾아갔다. 그러나 병원 앞에서 수없이 줄담배만 피우고 망설이며 막상 한 번도 딱한 사정을 호소할 기회를 갖지를 못했다.

그 당시 나는 숭실대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규정상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술과 담배를 마시거나 피우지를 못하게 되어있었다. 일 년 동안 수술도 여러 번 받았고 치질 외에도 신경쇠약과 위궤양 등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까닭에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한 상태에 있었다. 유일한 낙인 술과 담배를 규정을 어겨가면서 기숙사의 실내에서 여러 번 했다. 사감목사한테 적발되어 꾸중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퇴사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그 해의 쌀쌀한 초겨울 한낮에 텅 빈 기숙사에서 혼자 술과 담배를 즐기고 있는데 사감목사가 와서 “오늘 당장 퇴사하라.”고 하기에 “나는 당신이나 퇴사하라.”고 울분이 섞인 음성으로 도리어 큰소리를 치면서 격한 감정의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결국 사감실에 가서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의 모든 형편을 조용히 듣던 목사는 성직자답게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면서 “참고 기다려 보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고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나에게는 며칠 후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숭실대 교목실을 통해서 세브란스병원에서 무료로 수술해주기로 했으니 입원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겨울방학 직전에 받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나의 일생 중 가장 기뻤던 순간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난생처음으로 나는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의 주님께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뒷날에 알게 되었지만 사감목사, 숭실대 교목과 세브란스병원 교목, 이렇게 세 분이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어려움에 처한 나를 세브란스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는 사실이다.

▲ 1960년대 서울역 앞의 세브란스병원 전경

내가 전신마취에서 깨어났을 당시에 수술실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퍽이나 놀랐는데,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나의 치질은 독특한 것이어서 의과대학생과 인턴들이 함께 견학했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수술이 끝나고 입원실에 며칠 있다가 재활원으로 옮겨서 한 달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다.

이 재활원은 1953년에 절단재활을 위하여 의수족부가 세브란스병원에 설치되어 기독교세계봉사회에서 운영을 시작한 곳이다. 내가 물리치료를 받으며 머문 숙소는 군대의 막사와 같은 곳으로 이곳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던 약 15명의 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전부 최소한 팔다리 하나가 절단된 20대와 30대의 청년들로서 수술은 끝났지만, 물리치료와 퇴원 후 자립할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다니면서 시계수리나 구두수선과 같은 간단한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야 거동이 가능한 사람도 있었으나 팔다리가 온전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주로 이곳에서 치료 중인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로서 교회나 기독교단체의 추천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수술, 치료, 자립기술 습득을 할 때까지 병원의 모든 비용은 미국장로교선교부에서 부담하였다.

한 달쯤 지난 무렵의 어느 날 담당의사가 수술과 회복이 잘되어 재발할 우려가 없으니 한 일주일 더 있다가 퇴원해도 좋다고 알려 주었다.

동행이란 같이 비를 맞는 것임을 알게 돼

사실 나는 한 달간의 재활원생활을 통해서 ‘사람은 함께할 때야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성숙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비록 함께 치료를 받는 재활원원생들은 가난하고 못 배웠고 장애인들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꿈이 있었다. 아름다운 동행 이란 함께 우산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행위임을 알게 되면서 깊은 신앙과 형제 이상의 협동정신을 실천하며 나눔의 삶을 보여주는 그들의 행위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비로소 나의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가난한 내 나라의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한 미국장로교선교부의 헌신적인 봉사정신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은 했지만 봄 학기가 시작될 무렵까지는 한 달 남짓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에 다행스럽게도 내가 대학 1학년 때 가정교사를 하며 가르쳤던 봉원사의 박영상(전 봉원사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요양도 하고 겨울방학을 편하게 지날 수 있었다.

1년이 넘도록 여러 번의 수술을 받으며 병마에 시달리느라고 신경도 많이 쓰고 잘 먹지도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나에게 세심한 배려로 식사도 잘 챙겨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개강이 될 때까지 돈 한 푼 받지 않고 따뜻한 정성으로 보살 펴준 박영상의 부모님 은혜는 너무 감사하여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박영상의 가정교사로 나를 소개해준 친구인 백종화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그는 당시에 이대 입구에서 주먹세계의 두목으로 통했지만, 의리와 의협심이 강한 사나이였다. 그는 유년시절 초등학교 때만 생각하고 항상 나를 공부벌레로 다른 사람들한테 소개하는 소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 후에 치질은 완치가 되었으나 그때 얻은 신경성 위장병은 지금도 나를 종종 괴롭히고 있다. 병원에 있을 때나 요양을 하면서도 큰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내 머릿속에서 항시 사라 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내 꿈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현실 상황이지만, 점차 건강이 회복되자 내면에 잠재된 꿈과 이상이 나의 의식을 지배 하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고급공무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 삶의 좌표를 수정하고 대학교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 결정을 한 것은 4학년 봄학기 직전이었다. 그 후에도 전공은 몇 번 바꾸었지만,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신념을 결코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시 말해 병원생활이 내 일생의 직업을 선택하고 결정해준 셈이다.

한때나마 용서의 큰 철학을 실천한 넬슨 만델라는 “세계를 바꿀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공부라.”고 언급한 적이 있듯이,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오로지 공부라고 결론을 지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