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학교에 있을 때만 일시적인 관계로 맺어지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오래간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선생과 스승의 차이와 학생과 제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끌어올리는 정성스런 강의를 하면 선생이다. 더 나아가 학생들의 영혼까지 움직이면 스승이다.”
이처럼 가르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면 학생이고 그 영혼을 움직이면 제자이다. 이 점에서 존 러스킨의 “무관심은 죄악이다. 인류에게 가장 큰 죄악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지적처럼 무관심이야말로 비인간성의 핵심이다. 바로 이 같은 지적은 이 땅의 스승이라면 반드시 기억에 담아두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6세에서부터 22세까지 공부하기 때문에 많은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게 된다. 나 자신도 학생 때는 몰랐어도 공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며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선생을 한두 명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생들도 많은 학생을 줄곧 가르치다 보면 몇 명의 학생한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학교는 많지만, 스승다운 스승이 없다.’는 말과 빗대어져서 ‘선생과 학생은 많지만, 스승과 제자는 실로 드물다.’라는 말이 보편적인 말로 그 의미가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예전과 같은 사제지간의 끈끈한 관계가 사라진 지금, 그나마 의식이 깨어있는 극소수의 이들이 인간관 계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을 무의미하고도 하찮은 독백이라고 무시 할 수는 없다.
관계중심의 사례
만약 내가 사회학과 교수였다면 관계중심에 대해서 좋은 사례로 쓸 수 있는 기회가 2012년 여름에 있었다. 40년 동안 단절되었던 학생들과 교수들이 함께 모처럼 4박 5일간 미국 서부지역을 관광하였다. 그것도 모든 준비와 비용을 미국과 한국에 있는 제자들이 부담했다.
이들은 1960년대 미국 팀 선교회 선교사들이 운영했던 관동대학에서 가르쳤던 교수와 학생들이다. 초청받은 교수들은 김택용(신학), 이무용(영문학), 최길순(법학), 김석희(경제학), Ross Beach(선교사)와 John Rathbun(선교사) 등이다.
마지막 날 재상봉을 할 때 두 선교사는 무척 감동한 것 같았다. 서양에서는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다면 이와 같은 재상봉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이들이 감동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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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팀 선교회가 운영할 당시(1960년대) 관동대학 학생들과 선생들의 40년만의 재상봉 (2012년 3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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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봉 이후에도 나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전인철, 염일부, 강덕병이다. 전인철 목사는 관동대학 성문과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생명의말씀사’라는 성서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염일부는 관동대학 상학과를 나왔지만, 목사가 되어 지금 ‘서울강북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나이로 치면 염 목사의 조카쯤 되는 강덕병은 강릉출신이긴 하지만 관동대학 출신은 아니다. 그는 한때 관동대학교를 운영했던 TEAM(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선교회가 세운 ‘서울중앙복음교회’ 담임목사이다.
나는 서울에만 가면 몸은 지치고 피곤하여 자꾸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참고 일어나 두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면 활력이 생기고 마음이 편해진다.
재상봉 때 내가 만난 40여 명 가운데 왜 이 세 사람과만 계속 연락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규모가 크고 유명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보다 규모도 적고 이름 없는 목사가 시무하는 강북교회나 복음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면 왜 마음이 편해지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위 세 사람은 전형적인 ‘감자바우 촌놈’ 같고 나는 전형적인 ‘문경 촌놈’ 같기 때문인 것 같다.
감자바우는 “감자 바위”라는 경상도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물론 감자바우는 강원도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이다. 감자바우는 감자 먹고 자란 사람에서 나온 말로 시골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경 촌놈이란 내가 대학 때 동기들이 지어준 별명이니 내가 전형적인 촌놈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신나는 노릇이다. 천성이 촌놈이라서 그런지 촌놈의 천성을 가진 이들과 연락하거나 만나기만 하면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와 서로 공감할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깊어질 수 있다. 깔끔한 인간은 깔끔한 인간과 사귀고 촌놈 같은 인간은 촌놈 같은 인간과 사귄다. 그것은 우선 마음이 편하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이라고 해서 인맥이나 학연을 경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인맥이나 학연은 거래의 중요성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임시관계에 불과하다. 하나의 실례지만 성우회를 통해서 보면 한국은 같은 학교 출신으로 인해 맺어진 학연은 영구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사제지간의 재상봉행사는 1973년에 성문과를 졸업한 전인철의 주선으로 그때의 관동대학 졸업생들이 2009년 조직한 성우회라는 동문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모임은 동문 간의 우의뿐만 아니라 사제지간의 정을 돈독히 하며 모교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졸업생들의 스승에 대한 배려는 유별나다. 학교의 졸업생들이 졸업하면 서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사은회라는 모임을 가진다. 대신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교직원과 가족들의 앞에서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가진 학생들을 인정하는 시상식을 가진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스승을 위해 하는 행사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 혹독하게 말하면 졸업으로 선생과 학생 간에 지식의 판매와 구매가 끝나기 때문에 사제지간의 관계는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