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0년대의 대부분을 미국유학준비에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디어 그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페퍼다인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1969년 12월 말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환송을 받으며 희망찬 마음으로 미국행 서북 항공기에 탑승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탑승한지 몇 시간 후부터는 감회보다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내가 직면한 어려움은 하나둘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처럼 말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12월 중순에 도미하려던 계획을 예기치 못했던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2월 말로 연기시킨 탓에, 우연히 해결되었다. 대학의 개강은 1970년 1월 초로 되었기에 몇 주일 일찍 이곳에 도착했다면 갖고 온 얼마 안 되는 돈을 전부 쓰고 빈털터리로 미국에서 첫 학기를 시작했을 뻔했다.
숙소, 학자금 등 준비 없이 도미
또 두 번째 어려움은 교통수단과 숙소 등을 미리 마련해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페퍼다인 대학뿐만 아니라 그때 미국에 있었던 친구들에게 미리 연락해서 개학할 때까지 일주일 동안의 교통이나 숙소의 문제 등을 마련해두지 않았다. 이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삼촌이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며칠을 휴식하다 뉴욕으로 가게 된 한국 유학생의 옆자리에 앉게 된 인연으로 그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참으로 우연이지만, 고마운 유학생과 그의 삼촌의 도움으로 개강 때까지 교통, 숙소와 그 외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세 번째 위기는 첫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 그리고 책값 등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 조달이었다. 일주일 동안 학교 밖에서 거처했기에 막상 개강 무렵 내 지갑에는 내가 한국에 갖고 온 200달러의 절반인 100달러밖에 없었다. 내 지갑에 남은 100달러와 한 과목 등록금에 해당하는 예치금만으로 견딜 것을 생각하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고, 걱정은 태산이었다. 예고된 결과이지만 도미준비에 필요한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의 결혼반지까지 팔아야 했고 고학 외에는 다른 곳에서 학자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향학열에 불탄 나머지 미국유학을 무모하게 시작하였다.
미국대학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등록과 기숙사 입사는 먼저하고 등록금과 기숙사비는 나중에 청구서를 받아서 일정한 기한 내에 지불하게 되어 있다. 내 주머니에 남은 돈은 책과 학용품을 사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9학점을 신청하고 기숙사에 입사는 했지만 당장 필요한 학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그저 막막한 상태였다.
일단, 대학등록을 끝내고 기숙사에 입사하자마자 외국학생상담소 직원들과 등록 때 알게 된 한국 유학생들과 만나서 교내 외에서 아르바이트 자리 문제를 상의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처지로는 그 누구의 재정적인 도움 없이 이 같은 일을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 번째 감당키 어려운 위기는 세브란스의대를 나와 세인트루이스 대학병원의 인턴으로 있던 나의 윗동서 (박득재)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1970년, 그해 여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은 겨울방학이 긴데 비해 미국은 여름방학이 길다. 동서의 도움으로 봄학기를 무사히 마친 나는 여름방학 4개월 동안(5월부터 8월까지) 가을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
첫 직장은 1970년 4월 말 여름학기 시작과 함께 페퍼다인 대학에서 첫 학기 때 함께 공부했던 연세대 정외과의 출신인 유천근의 소개로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하였다. 일주일에 5일 동안 매일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8시간씩 노동을 하는 정규직장인데 고용계약 때 2주마다 나오는 임금의 액수가 예상보다 많아서 무척이나 놀랐다.
여름방학 4개월 내내 이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면서 저축할 돈을 계산해보았더니 9월부터 시작되는 가을학비는 고학생의 신분으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했다.
나와 파트너가 하는 일은 플라스틱 두루마리가 조립대에서 나오면 그것을 둘이서 받아서 하급 파트너가 달리(손수레)로 그 두루마리를 지정된 장소에 옮기는 단순 작업이었다. 내 파트너는 체격이 나의 2배나 되는 흑인이었는데, 아무리 두루마리가 커도 한 손으로 자기 쪽 두루마리를 가볍게 들어 올 렸지만, 체격이 허약한 나로서는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 있는 힘을 다 동원해도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더구나 달리로 롤을 옮기는 일도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는 했지만, 막상 나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겨운 육체노동이었다. 내 파트너는 다음 롤이 나올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쉴 수 있어도 나는 단 1초도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
마침 첫 주 4일 동안은 작은 롤이 나와서 큰 탈 없이 감당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너무 힘에 겨워 계속할 것 같지 못해서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데 5일째 되던 날은 걱정하던 큰 롤이 나왔고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여서 달리로 플라스틱 롤을 무리하게 옮기다 플라스틱을 실은 달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졌고 발등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나의 상관이 응급치료를 해주고 많이 아프면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지만, 나는 내심 해고될까봐 걱정이 되어 별것 아니라고 대답을 하였고 그날 남은 시간은 내 파트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을 마쳤다.
사고로 몸을 다쳤지만 해고될까봐 안 아픈 척
발등에 피는 별로 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붓고 상처 입은 부위가 아팠다. 쉬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약을 사다가 치료를 했지만 별 효과가 없고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끝내 심한 통증으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그 다음 주 월요일에는 일을 시작한지 한 시간도 못 되어서 롤을 옮기다 또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돌같이 단단한 플라스틱 롤이 가슴에 부딪히는 바람에 숨쉬기가 힘겨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모두에게는 별것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그날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목욕도 하지 못한 상태로 피곤함에 지쳐 12시간 남짓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 매일 밤 12시에 버스를 타고 하숙집에 돌아와서 거울을 보면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고 코에 들어간 먼지를 씻어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화요일에 출근은 했으나 너무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더니 내 상관은 주소를 알려주면서 그 회사의 지정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X-ray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뒤 물리치료를 해주고 가급적 매일 치료 받으러 오라는 말을 들은 후에 다시 회사로 갔다. 회사에서는 계속 치료를 받고 완전히 나은 후에 회사로 출근 하라는 권고와 함께 무엇보다 나의 건강을 걱정하여 주었다.
뒷날에 거의 50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골프를 치다가 스윙을 잘 못한 탓에 가슴을 다쳐 미시간 대학병원 통증 전문치료의원에서 진찰하는 중에 과거에 갈빗대가 부러졌었는데 언제 그렇게 되었느냐고 의아하게 전문의가 물어왔다. 그 당시 내가 플라스틱공장에서 작업 중에 가슴을 다쳤을 때 그 누구도 갈빗대가 부러졌다고 얘기해주지 않았고 나 또한 그 당시에 갈빗대가 골절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의 사고로 골절된 갈빗대는 수술을 않고도 저절로 나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우리 인체의 오묘한 치유 기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주를 치료하고 회사로 돌아갔더니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전보다 쉬운 일을 맡겨 주었다. 플라스틱 롤을 만들다 떨어져 나온 조각들을 큰 가위로 적당히 잘라서 기계에 넣으면 가루가 되어 나왔는데, 이 가루는 플라스틱 롤을 재생산하는데 다시 사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