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사업(핵연료주기(核燃料週期) 확립)(104회)
  제13장 원자력연구소1

KIST가 본격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부터는 응용연구, 즉 실용연구라는 조류가 과학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동안에는 국고(國庫), 예산사정 등으로 장치(裝置)연구는 꿈도 꾸지 못하고 기초연구 즉 Paper work에 치우친 연구 사업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연구요원들의 자질도 문제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해외 과학기술자의 수혈을 통해서 해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자 국내의 토종 과학자들도 해외연수 등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돌아와서 세계 과학계의 동향을 알게 되었으며 실용 연구에 대한 엄청난 Pressure를 느끼기에 이른다.

1973년 1차 「오일 쇼크」를 경험하면서, 전력에너지는 원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콘센서스」가 이루어졌다. 에너지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로서 두뇌집약적인 원자력 발전만이 해결의 길이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또한 원자력이란 양날의 칼처럼 양면성이 강한 분야이다. 당초 개발목적 자체가 전략적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메리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요원들은 국가안보라는 측면에서도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연구에 임하게 된다.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연구원자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다음 원자로를 가동할 수 있는 핵연료를 제조한다. 이를 원자로에 집어넣어 태우면 원자로가 가동되고 거기서 나오는 소위 재(灰)를 사용후 핵연료(Spent fuel)라고 한다. 이 「재」에서 「플루토늄」과 남아있는 「우라늄」을 분리해 내는 작업이 「핵연료재처리」라고 하며 대단히 민감한 분야이다.

(1) 핵연료개발공단

핵연료주기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74년 12월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직을 신설하게 되었다. 초대 부소장으로는 MIT 화학공학 출신인 주재양(朱載陽) 박사를 영입하였다. 핵연료가공과 재처리는 화학공정(化學工程)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최형섭 장관이 윤 소장과 협의하여 화공계 출신을 물색, 임명한 것이다.

주(朱) 박사는 MIT 졸업 후 NORTH-EASTERN UNIV.에서 조교수로 근무하다 HALEAN INTERNATIONAL에서 Head-Designer 그리고 PM을 거쳐 초창기 한국비료에서 기술 분야를 총괄하면서 화공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분이다.

프랑스 기술협력 및 차관(借款)
한국과 일본의 원자력 기술 종주국은 역시 미국이다. 대만은 중국을 의식한 미국의 끈질긴 감시와 견제 때문에 기술 도입선을 미국이 아닌 CANADA로 전환하여 40,000Kw 급의 NRX 중수형로(重水型爐)를 도입키로 했으며 당시 대만은 풍부한 외화의 뒷받침으로 현금 구입이 가능했다.
 
▲ 원자력 발전기술 심포지옴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했다 / 삼총사(이덕선, 서호, 김진휴)가 보인다. 연구실의 준비요원 일동(1975.)

한국은 1956년 2월 3일 한미원자력협정이 정식으로 발효되면서 기술협력이 개시되었고, 1958년 2월 TRIGA MARKⅡ(100Kw) 도입이 결정되면서 미국에 본격적으로 요원을 파견하여 기술훈련, 기술전수에 돌입했다. 그후 10여년이 흘러 기술이 다소 축적되고 내자(內資)조달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면서 MARKⅢ(2,000Kw) 연구로가 건설되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Toy가 아닌 실증 연구 활동의 필요단계에 이르러 주기(週期)의 확립은 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발걸음이었다.

1979년 중순 미국 NFS사와 교섭을 하였으나 그 회사는 상용(商用)시설에만 관심이 있고, 차관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포기하였다. 그간 연구소와 오랜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알곤국립연구소에 재처리분야의 기술훈련과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그도 응해 주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1979년 5월경 과기처 최형섭 장관이 프랑스와 영국을 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한불, 한영 간의 원자력협정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핵연료공사(BNFL)와의 협상은 차관방식 문제로 또다시 난관에 봉착해 포기하고, 프랑스 쪽으로 단일화, 집중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와 SAINT GABIN(SGN) 그리고 CERCA사와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1973년 9월 윤용구(尹容九) 소장이 CEA, SGN울 방문하고 핵연료 가공 및 재처리 사업의 협력 방안을 본격적으로 협의했다. 정부 간 차관교섭이 매듭짓는 대로 건설계약을 체결하도록 구체적인 교섭까지 진행되었다.

드디어 주재양(朱載陽) 특수담당 부소장이 프랑스에 가서 재처리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을 SGN사와 체결하였으며, 우라늄 핵연료 가공 시설의 도입은 CERCA사와 정식으로 계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제 행정책임자로서 나에게 모든 계약서와 차관 관련 업무에 대한 뒤치다꺼리 마무리 작업이 떨어졌다. 프랑스에 직접 가서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유럽 각국의 원자력기관 방문과 프랑스와의 핵주기기술 공급에 관련된 여러 계약서에 마지막 INITIAL(계인서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확정 서명된 계약서를 상호 교환하는 절차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연구소 개편 후 2년여에 걸쳐 불철주야 일한데 대한 보상 위로여행의 뜻도 가미되어 있었다. 지난 2년은 정말로 별보고 출근하고 별보고 퇴근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당시의 공직생활이란 다 그러했지만 사생활, 소위 행복추구란 우리에겐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연수, 시찰 목적도 겸했기 때문에 여행 기간도 넉넉히 잡아 1개월로 정했다. 방문국과의 협의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모든 Reservation을 완벽하게 잡았다. 당시 외환이 부족했던 우리로서는 프랑스 외무성의 대외원조 형식의 Quai d'Orsay Assistance라고 한다. 이제 7, 8월이면 행정실장으로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기획원과의 예산 협의도 대충 마무리 짓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떠날 수 있었다. 예산 전문가 서(徐) 차장에게 맡겨 놨으니 든든하기도 했다.

 
  행정관리실의 개편과 인사_2 (103회)
  유럽출장_독일여행 (1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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