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연구소 근무의 여적(余滴)_1 (114회)
  제14장 원자력연구소2

과학원 학생의 죽음

1976년 초봄 어느 토요일 아침의 일이다.

한국과학원 (당시 KID: KAIST의 전신) 파견학생 김학묵 군은 석사논문(화공과) 마무리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친구와 점심 약속도 되어 있고, 빠른 시간 내에 그날의 연구 과제를 끝내야만 했다.

연구소에는 대단위 조사(照射)시설 300,000CU의 Cobalt 60과 소규모의 시험용 시설이 있었다. 대단위에서는 준 상업용으로 의역품의 멸균 그리고 식품의 소독과 개발 등을 위해 가동되었고, 연구소 초창기에 도입해 사용하던 15,000CU짜리는 주로 연구 실험용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 조사(照射)시설들은 「마법」의 장치들이었다. 전투용 붕대가 가득 찬 Box를 집어 넣으면 완전 소독이 되어 각 부대로 바로 추진할 수 있고, 싸구려 목재를 합성수지를 발라 구우면 딱딱한 고급 강화 목재가 되어 나오고, 그것뿐이 아니다. 일반 수정을 집어 넣으면 고가의 자수정, 연수정으로 변해서 나오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 마디로 말해 「마귀의 불」이라고 하면 어떨지. 여하튼 잘 활용하면 참 좋은 시설이라고 항상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김학묵 학생은 화공계열 석사논문을 쓰면서 이 소형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보건물리실(保健物理)과의 협조로 기본적 이용학습이 끝나 있었고 혼자서 단독 운영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 마(魔)의 토요일 아침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삼중으로 된 안전장치가 작동했을 터인데도, 방사선 Source가 공중으로 솟아 있어 치명적인 상황이 올 수 있는데도 이를 깜박 잊어버리고 약 10여분 평소대로 작업을 했다. 밖으로 나오면서 빨간 불이 켜져 있고, 싸한 기분을 느껴 Control을 쳐다보니 이미 모든 것은 끝난 뒤였다. 부랴부랴 물리실에 신고해서 담당자가 나와 보니 방사선에 노출된 것이 틀림없어 바로 긴급히 광화문에 있는 원자력병원으로 후송을 했다.

가뜩이나 연구소가 핵개발 「범죄집단」이라는 의심까지 받는 터에 원자력으로 사람이 죽었다 하면 이런 난리가 없겠다. 윤(尹) 소장 중심으로 비상회의가 열렸다. 우리 행정실에서는 첫째 가족에게 연락하는 일, 그리고 보도관제(報道管制)를 위한 언론기관과의 협조, 끝으로 우리 정보기관에 알려 협조를 구하는 일, 모두 대외적으로 진화(鎭火)하는 일이다.
 
▲ 1975년 열린 한국과학원의 1회 석사학위수여식 ⓒ카이스트

언제나 행정, 관리에서 뒤치다꺼리가 소임이다. 우리 스스로를 Pixy(신데렐라가 지쳐 쓰러지면 밤중에 몰래 나타나 깨끗하게 설거지를 해 놓고 사라지는 착한 요정)라고 부른다. 연구소의 주인은 연구요원들이고, 이들이 이 연구, 개발에 몰두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또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행정, 관리 쪽에서 관료적이고 군림하려고 하면 그 연구소는 끝장이다.

원자력병원 이장규(李章圭) 박사가 주치의가 되어 본격적으로 치료에 나섰다. 방사선 의학에 관한 한 국내에서는 일인자였고, 마침 펜실베니아 의대에서 방문 의사로 와 있는 김(金) 박사가 우리나라 처음으로 적혈구만 뽑아내는 특수 장비를 가져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계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나에게 생겼다.

그날 퇴근길에 병원에 들렀다. 김학묵 군 병실에는 약혼녀(약 한달 전 약혼하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할 계획이었음)가 와 있었다. 김 군(君)은 약간 수척해 보였고 우유팩을 들고 마시는 손이 약간 떨리는 증세가 보여 이것들이 고장의 징후인가 생각했다. 약혼자는 경북 영일의 김 군 생가에 연락은 해 놓았다고 했다. 나는 좀 더 경과를 보아서 사람을 보내서 기별을 할 요량이었다.
 
이(李) 박사 말로는 세 시간 마다 채혈해서 적혈구 Counting을 하고 있는데 일단 오늘 저녁을 넘겨봐야 가부간 판단이 서겠는데 지금으로서는 좀 어렵지 않나 걱정이 된다고 했다. 척추에 방사선이 가면 조혈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에 백혈병 증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쬐인 시간과 「도스」의 양으로 봐서 상당히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허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AE 회사설립 / 미국 Burns and Roe사와 합작으로 나는 이 회사의 이사를 겸했다

우선 그날 밤 과학기술처 출입 기자용 간사와 연락해 만나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보도관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자단 전원과 협의를 해야 한다면서 다음날 저녁에 소집해 주었다. 연구소가 처해 있는 작금의 현실과 이것이 국제적으로 흘러갈 경우 매우 난처하게 된다는 이야기 등, 읍소 아닌 읍소를 거듭했다. 그리고 책임소재를 밝혀 재발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양식이 있는 기자단인지라 국익 차원에서 이것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간사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나는 먼저 자리를 떴다. 밤중에 간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모두 협조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전해 주어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출근과 함께 중앙정보부 이철희(李哲熙) 차장실에 연락해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보도문제에 관심 가져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제 김(金) 군의 회복만을 기원할 수밖에 없다.

퇴근길에 들렀더니 김(金) 군은 벌써 입가가 부르트고 완전히 생기가 없어 보였다. 이 박사의 말에 의하면 적혈구 수치가 급속하게 떨어져 미국 김(金) 박사가 가져온 혈구분리기(血球分離器)로 적혈구를 뽑아 수혈을 계속해오고 있는데 2, 3일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필사적으로 회복시키려 24시간 대기하며 노력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처음있는 환자이기 때문에 방사선의학(醫學) 입장에서는 엄청난 학술적 Case이기도 했다.

4일째, 병원에서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조혈능력을 높일 방법이 없다며 극히 낙담하고 있었다. 이제 끝이구나, 혼자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소장과 상의해 시설과장을 포항 영일읍의 김(金) 군 집에 급파하여 가족을 모시고 오도록 했다. 파견된 시설과장과 김 군 아버지와의 대화에 의하면 영일군(迎日郡)에서는 김 군이 한국과학원에 입학한 첫 케이스였고, 출신 국민학교와 읍사무소에 플래카드가 붙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집안의 희망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 둘 바를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나라 일을 위해 자식 바치는 거야 당신 혼자만의 일이겠느냐고 말하는 아버지의 의연한 국가관에 놀랐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많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약 1주일 후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날이 오고 말았다. 그동안 과학원 주임교수였던 심상칠(沈相七: 후에 KAIST 총장 역임) 박사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매일 환자 옆에서 살다시피 했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였고, 연구 「테마」 선정에도 심(沈) 박사의 지도가 컸다고 한다. 당시 자기가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며 많이 자책을 하고 있었다.

장례는 과학원장(葬)으로 치러졌다. 김 군 어머니의 그 비통해 하던 모습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기자단의 보도관제 약속은 지켜졌고, 20여년 후 한 일간지의 과학부장을 지냈던 분의 회고록에 잠깐 그 사건에 관해 언급된 바 있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압박 (113회)
  원자력연구소 근무의 여적(余滴)_2 (1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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