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에서의 제대(除隊)와 KNE로 이전(移轉) (118회)
  제14장 원자력연구소2

연구소 근무도 어언 5년이 지났다. 퇴임시 소장 명의의 감사패에 언급한 「귀하는 1973. 9월부터 1977. 9월까지 행정관리실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헌신적인 노력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연구소의 초창기 기반조성과 그 도약 발전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므로 이에 감사패를 드립니다」 라는 구절과 같이 연구소 기초를 잡는데 많은 힘을 썼다.

그 많은 규정과 각종 사업계획서 그리고 핵연(核燃)개발공단과 K-BAR, KNE의 설립 등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이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이런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시기를 보람과 때로는 희열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행정부서의 Team work와 소장(所長)의 전폭적인 신뢰와 Leadership 때문에 가능했다.

윤(尹) 소장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나의 고교시절의 짝꿍이요, 정구부의 Par-tner였던 윤용완(尹容完) 군의 형님인 관계도 있고 해서 서로 믿는 가운데 일처리가 아주 수월했다. 청렴하고 부지런한 성격의 윤 소장은 한번 믿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만 믿을 때까지는 직원들이 많은 눈물을 짜기도 했다.

윤 소장은 웬만한 권한은 다 나에게 위임해 주었다. 연구소에서는 새로 입소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영어시험을 치르게 했다. 박사학위를 가진 자에게도 초창기에는 예외가 없었다. 이 영어시험 출제의 책임은 나에게 떨어졌고, 총무과 인사계에서는 시험 당일 아침에 나에게서 문제집을 가져갔으니 유출된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그리고 구매계약의 예정가도 나에게 위임되었고, 5년 동안 문제가 된 것은 한 건도 없었다.

이쯤해서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행정관리실장이라는 자리는 연구소에서 행정가로서는 최고봉이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 연구계 인사는 보직을 맡았더라도 필요에 따라 언제나 연구요원으로 복귀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5년이고 10년이고 버티고 있으면 기획차장, 행정차장, 연구관리차장(후에 독립부서가 됨) 3명은 차장으로 끝나야 되고, 그 아래 수많은 과장은 요지부동이 되는 아주 경직된 직장이다.

소위 SKY 대학을 졸업한 법과, 경제과, 경영과 출신들이, 직장의 분위기와 당시로서는 비교적 좋았던 보수 등의 이유로 경쟁적으로 입소했다. 그러나 생각이 많고, 아주 아깝다 싶은 우수한 직원이 얼마 있지 않아 나가는 바람에 종종 나를 허탈하게 만들곤 했다.

‘중고차가 언덕길을 가로막고 서있는 격인데’ 이제 후진을 위해 빨리 움직여 주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기획차장이었던 서호(西湖), 서연호(徐演浩)는 서울시에서 예산, 기업회계의 베테랑으로서 계속해서 거기에 있었으면 부시장 급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徐) 형과 계장, 과장으로 같이 승진했던 윤백영(尹伯榮) 씨는 이미 제2 부시장으로 승진하고 있어, 나는 언제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4,5개월 후에는 윤(尹) 소장의 중임(重任) 임기도 끝나는 시점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윤 소장과 상의했더니 아쉽지만 동의해 주셨고, KNE로 이적(移籍)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환영을 했다.

행정실장 후임자를 지명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소장이 최(崔) 장관과 상의하기로 했다. 이렇게 후속인사가 비교적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제일 걱정했던 해외 과학자 유치 문제도 1977년 말경부터 순조로워 좋은 인재들이 속속 입소하는가 하면, 연구소에 근무하다가 외국의 좋은 대학에 가서 학위를 하고 귀국하는 부류도 늘고 있었다.

유치 과학자를 위한 전용 아파트를 동부이촌동에 열 채를 구입하여 바로 가정살림이 가능하도록 준비했다. 여담이지만 동부이촌동의 한강변 아파트를 구입할 당시 삼익건설에서 지어놓고 분양이 안 되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현금으로 열 채를 산다고 하니 서비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원자력연구소를 떠나면서 감사장을 받음(1977.) / 윤용구 소장 그리고 임직원 일동

아파트 가격 자체도 최하로 조정 받고, 각 세대에 에어콘과 대형 냉장고 하나씩을 넣어 주는 조건도 수락이 되어 연구소 측에서는 많은 비용 절감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연구소가 대덕으로 이전, 합병했을 때 아파트 가격이 최고로 좋아 대덕단지 건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후일담을 듣고 흐뭇했다.
 
원자력연구소 간부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나에게 감사패가 수여되고, 후임 실장에 서연호(徐演浩)가 취임, 업무를 개시했다. 나는 KNE에 바로 입사하지 않고 주변 정리를 하면서 약 한 달 가까이 쉬기로 했다.

만 47세, 인생의 절정기에서 과연 공직에서 무사, 안정된 시간만 보낼 것인지 아니면 이때 과감하게 털고 일어나 나 개인의 취향에 맞춰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것인지 고민도 해 봤다.(Event를 중심으로 하는 광고기획사, 관광회사(일본 친구가 여러 차례 권했음) 또한 유학원(留學院) 등 Software 쪽으로 많은 구상을 해 보았다.

역시 개인사업이란 「리스크」 가 따르는 법 그리고 자금 동원 문제, 실패해서는 안 되는 나이 등, 많은 제약 요소가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가정경제는 그런대로 내자(內子)의 꽃장식 사업이 본 괘도에 올라 어려운 처지가 아니었고, 계속 공직에 있어도 청렴도를 유지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은 했다.

KNE로 말하면 K-BAR 때부터 산파역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KNE 창설 때도 직접 관여했던 관계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원자력의 국산화란 대의명분이 언제나 나의 뇌리를 자극했다.

약 한 달 휴식 후, 연구소 내(內) 옛 원자력농학연구소에 위치한 KNE에 들러 곧 부임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한전 사장인 김영준(金英俊) 씨를 방문했다. 김(金) 사장은 내가 총리 경제시정비서실에 근무했던 60년대 중반에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로 계셨다. 그리고 내가 총리실 옵서버로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경제각의(經濟閣議)에 참석하면서 3~4년간 자주 뵙던 분이었다.

원자력연구소 당연직 이사장(2대 이사장, 초대(初代)는 민충식 사장)이었기 때문에 이사회 개최 때마다 가까이에서 모시던 인연이 있었다. 이사회가 끝나면 광화문 장원(莊園)에서 언제나 회식이 있었다. Head table에 자리한 김 이사장님은 주변의 높은 분들의 이야기가 Golf, 패설(悖說) 그리고 개인자랑으로 번지면 대화에 흥미를 잃는다. 점잖은 영남(嶺南)의 선비형인지라 그런 대화에 계속 끼어들어 같이 맞장구치는 것이 괴로우면 말석에 앉은 내 자리 앞으로 슬그머니 오셔서 말을 거신다. 옛날 경제 각의 때의 이야기 등등으로 회고담을 나와 함께 즐기셨다.

찾아뵙고 내가 KNE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향을 말씀드렸더니 매우 반기면서 “잘 했어.” 하신다. “KNE의 목표는 무엇인가?”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신다. “예, 저는 원자력의 국산화라고 생각합니다.” 대답했다. 김영준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경영의 달인이요, 전략가이기도 했다.

[원자력연구소와 한국전력은 지난 10여 년 동안 양보 없는 「라이벌」로 지내왔다. KNE 같은 A/E 회사는 마땅히 한국전력 산하로 들어와야 한다. 연구소는 상업적인 분야는 민간에 맡기고 진실로 국가적 R&D만을 해야 한다. 그리고 KNE 같은 A/E 회사를 육성해서 설계의 국산화를 달성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연구소는 정부 예산으로 움직이는 기관으로서 A/E 투자에 한계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 상공부 그리고 한국전력의 일반 경향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KNE는, 가만히 두고 보면 자연히 한국전력의 우산 밑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미리 나서서 과학기술처와 싸우고, 연구소와 대립하는 양상은 피하고자 함이 신임 김영준 사장의 생각이라는 것이 지금 나의 분석이다. 그분의 임기 동안 생각했던 대로 KNE는 KOPEC라는 모자로 바꿔 쓰고 한국전력 자회사로 입적하고 말았다. 이 얼마나 4, 5수(手) 앞을 내다보는 전략가인가?

 
  KABA와 KNE (117회)
  KNE 기초다지기 (1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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