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직에 있으면서 일정(日政) 때 경성고공(京城高工), 고상(高商), 고농(高農) 출신들과 많은 일을 해 보았는데 역시 실무적으로 강하고 아주 우수한 인재들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경성제대 출신들은 대개 학계로 진출하거나 야심이 있으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총독부의 고위관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구제(舊制) 고등학교 출신들은 실무(實務) 일선에 「엘리트」로 활동을 해 아주 실력 면에서 탄탄한 체질을 갖추고 있었다.
김영준 사장도 수원고농 출신으로 농림행정 기획원관료로 계시다 끝으로 농림부 장관까지 역임하고, 한국전력으로 오신 분이다.
나는 인사를 끝내고 다음날 KNE에 부임했다. KNE사무실은 태릉 원자력연구소 내 구(舊) 방사선 농학연구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이제 KNE의 감사(監事) 자리가 아니라, 행정담당 부사장의 직함으로 일을 시작했다. 감사는 원자력연구소의 감사인 전상근(全相根) 씨가 맡아 주었다. 인적 구성이라야 연구소 소장은 상징적 대표요 업무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한국전력 측에서 온 전(前) 영남화력발전소 소장을 지냈던 박희징(朴禧徵) 씨가 기술담당 부사장으로 그쪽 업무의 주력을 맡고 있었다.
박 부사장은 여러 가지로 전설적인 분이었다. 가족 배경이 모두 과학, 기술계 출신이다. 1950년대 중반 임시수도 부산의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30,000KW짜리 발전함(發電艦) Lady Star 호(號)를 미국에서부터 태평양을 가로질러 끌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두주(斗酒)를 불사하는 호방한 성격으로 사내(社內) 기술진의 분위기를 잘 잡아나갔다.
당시 인원이 4,50명 정도인데 연구소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후에 A/E의 국산화 NSSS 설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신재인(申載仁) 박사(후에 원자력연구소장, 핵융합연구센터장을 역임), 김삼곤(金三坤) 씨 그리고 지진설계의 독보적인 인재인 박형기(朴亨基) 씨 등이 초창기에 KNE에 합류해 주었다. 그동안 판촉, 사업개발을 위해 전방위로 노력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자금이 제일 문제였는데 산업계의 출자금으로 수개월 연명을 하였으나 그것마저 소진되고 완전한 자본잠식이었다. 월말에 직원들에게 줄 급료자금이 없어 모(母)회사인 연구소에 가서 구걸하는 형편이었다. 자금을 주무르는 행정실장, 이를 확인하는 감사 등 모두 친정식구들인데, 꾸어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월 25일이 되면 「살려 주세요」 하고 애걸하는데 이것도 못할 일이었다. 매월 약 2,500만원에서 3,000만원 부족한 상태였는데 서(徐) 실장은 “있는 돈 갖다 쓰시지요.” 해서 나를 위로해 주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서 실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전상근 감사가 대여금 서류에 대해 결제거부를 했다는 것이다. 급한 김에 감사실로 쫓아갔더니 JS 감사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기관이 다르고, 계정이 다른데 매번 연구소 시제에 축을 내면 감사원에 걸린다고 하면서, 형식적이나마 기관 대(對) 기관 대여형식으로 법정이자를 마련하고 돈을 가져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백번 옳은 말씀이었다. 그런 식으로 서류를 꾸미고 돈은 급한 대로 융통해 와서 급료는 지급했지만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또 하나 돈이 될 만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고리 1,2호기의 훈련용 Sim-ulater 설계였다. 한전은 KNE를 상정하고 용역을 주었는데 연구소의 해당 연구실(계측제어연구실)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자금이 궁했던 우리들은 한 푼 구경을 못해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자금난과 일감이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사기는 죽지 아니했다. 국가전원(電源)개발계획에 의하면 1990년경까지 20여 기의 원전(原電)을 가동 또는 발주한다는 야심찬 계획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과 실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1978년 6월 우리 전력사(電力史)의 산 증인인 신기조(辛基祚) 씨가 KNE의 수석부사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한국전력과의 관계가 일신되는 것은 물론 KNE의 방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에 윤 소장의 임기가 끝남으로서 전(前) KIST 전기공학부부장과 ADD 부소장을 역임한 현경호(玄京鎬) 박사가 2대 연구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신(辛) 수석(首席)이 부임하자 맨 먼저 한 일이 자금을 끌어오는 일이었다. 「재무구조의 건실화」란 말만 존재했지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만한 사람이 안타깝게도 연구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 수석은 김영준 사장을 찾아 애로를 이야기했다. 그 결과로 3개년 재무계획을 수립해 제출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곧 승인되어 매년 10억씩, 3년에 걸쳐 30억을 출자해 주기로 확정을 본 것이다. 이것이 KNE의 Seed money가 되어 본격적인 요원확보와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선 설계기술의 추진전략을 수립했는데 ,
제1단계 : 기본설계(Basic design)는 외국회사가, 상세설계(Detailed design)은 외국회사와 KNE가 공동으로 수행하고,
제2단계 : Basic design을 외국회사와 KNE가 공동으로, Detailed design 은 KNE가 단독으로 수행하며,
제3단계:KNE가 단독으로 수행하되 필요에 따라 외국 전문회사를 활용 함으로써 국내 주도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KNE(COPEC) 35년의 역사를 보면 용케도 위 전략대로 진행되었다. 신기조 회장의 회고록을 인용하고자 한다.
「...영광 원전 3,4호기의 설계업무를 과거와는 달리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KOREA POWER ENGINEERING CO. KOPEC: 1982년 7월 6일 KNE가 한국전력의 전액출자 회사로 전환되면서 명칭이 변경됨)가 주계약자가 되고 미국의 Sargent and Lundy사(社)를 하청업체로 선정하여 우리가 책임지고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주계약자가 되면서 KOPEC이 이번 기회를 통해 1995년 영광 3호기의 상업운전과 때를 맞추어 설계기술 자립목표를 95%로 할 것을 한국전력과 합의했다. 이 목표를 1995년 3월 영광 3호기가 성공적으로 출력을 개시함으로서 소위 기술자립 목표 95%도 달성했다. ...」
초기에는 요원확보, 훈련 그리고 사업 참여의 3단계에 있어서 우수한 인원 확보가 첫 단추에 해당한다. 연구소가 모집한 신출내기 공대출신 젊은 엘리트, 1차로 5명 그리고 7명 더해서 12명이 KNE로 넘어와 향도 역할을 해 주었다. 연구소에서 KNE로 옮긴 것에 대하여 별 불만이 없었던 것은 다행이었고, Scientist보다는 Engineer로 Career를 잡은 것은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KNE가 주최한 1기생 모집에서 38명의 우수한 인재가 입사했다. 영어시험을 중시했다. 미국대사관 USIS에 의뢰해서 시험을 치렀는데 미국 여자 직원이 직접 시험감독도 했다. 이제 1978년 들어 KNE 인원이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