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좋게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 국경 가까이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은 시간문제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10월 중순 중공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자 상황은 완전 역전되었다. 압록강변(鴨綠江邊) 혜산진(惠山鎭)까지 진출한 국군, 그리고 두만강 쪽으로 동부전선(東部戰線)으로 진격하던 美 해병사단(海兵師團)은 장진호(長津湖) 근처에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과 비전규전(非戰規戰 : 게릴라전)에 익숙지 못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을 차단당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여름에 지급된 복장과 장비로 10월 중순이면 서리, 눈이 휘몰아치는 북방국경에서 전쟁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전황이 갑자기 불리해지자 육군본부에서도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전방부대에 파견되었던 연락장교 1, 2기 생존자들이 부대가 와해된 후 단독으로 원대복귀 하는 일이 하나 둘 늘었고, 인천 포로수용소에 파견되었던 훈련생들이 공식명령도 받지 않고 서울로 무단 귀대하자 연락장교단은 혼란에 빠졌다.
특히 3기생들의 임관 날짜를 넘겼는데도 임관식은 없고 관보 작성도 하지 않는 혼란상태가 이어졌다. 일부 훈련생은 임의로 중위 계급장을 사적으로 구해 달기까지 했다. 나도 젊은 객기에 관명사칭(官名私稱)을 잠깐이나마 했었다.
11월 말경, 소개(疏開)이동 명령이 내려졌다. GMC 두 대가 배치되어 보급품과 군량 등을 챙겨 싣고 청량리역으로 갔더니 연락장교단 용으로 화물칸 5대가 배정되어 있었다. 밤 12시까지 기관요원 그리고 연락장교 후보생들 100여명이 곱배 차에 올랐다.
새벽녘에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역 가서 서고, 또 두서너 역 지나 서고, 기약 없는 이동이다. 중앙선도 수송수요의 폭증으로, 인력수송에 우선권이 있지만 여간해서 진전이 되지 않았다.
겨우 원주에 가서야 조금 질서가 잡혔다. 애국부인회에서 주먹밥을 양동이에 담아 역으로 가져와 하나씩 나누어 준다. 배가 고프니 먹을만했다. 마냥 가다 서다 하더니 드디어 영주쯤 가서 또 한없이 기다린다.
모두 밖에 나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장난기가 많은 원대복귀 선임 장교들이 중공군이 사용했던 자루 달린 수류탄을 몰래 가지고 다니다, 영주역 주변 얼음으로 덮인 큰 연못에다 대고 투척 연습을 했다. 두개가 던져지면서 쿠쾅, 쿠~꽝 하고 터진다. 나도 재수 없이 주변에 있다가 인솔책임자 徐중령에게 「엎드려 뻗쳐」 단체 기합을 받았다. 장교들은 기합을 받더라도 품위 상 「엎드려 뻗쳐」 는 하지 않는데 얼떨결에 하고 말았다. 첫 기합이었다.
4박 5일의 긴 여정 끝에 영천을 지나 드디어 대구에 입성했다. 연락장교단 본부는 약전(藥典)거리 조합 건물로 정하고 훈련생 및 복귀 장교들의 숙소는 대구시 동묘(東廟)로 정했다. 다소 안정이 되자 미군 측에서 연락장교들의 자질 문제를 제기해왔다.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장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기장교, 그리고 훈련생 전원에게 재시험과 임관에 필요한 호적등본 등 구비서류를 제출하도록 했다.
급히 시골 큰댁에 연락하여 호적등본을 보내주도록 했다. 경찰관이 된 진성형님이 기차, 트럭 등 걸리는 대로 얻어 타고 이틀 만에 대구에 오셨다. 너무 감사했다. 여담이지만, 그사이 대구에 내려와서는 행정과 일을 그만두고 보급과의 일을 보라 한다.
졸지에 창고의 불출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창고 안에는 무적(無籍) M1 소총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혼자 생각으로 총기는 위험하니 없애 버렸으면 했다. 마침 형님이 고향에서 올라오셨는데, 백운산 빨치산과의 전투가 무기 부족으로 대단히 고전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군에서 쓰던 9.9式, 3.8式 등 전근대적인 소총에 인민군에게서 빼앗은 「아시바」 소총 등 아주 무장이 말할 수 없이 취약하다고 했다. 우리 육군에 그렇게 흔해빠진 M-1 소총 하나가 없다고 한다.
측은해서 M-1 소총을 가져가서 쓰라고 넘겨주었다. 형님은 얼씨구나 하고 메고 가서 연발로 만들어 기관총처럼 사용하면서 지서 야간방어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