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임무는 첫째 쌍방의 의사소통을 위한 통역이었다. K.S.C 또는 한국인 종업원 대(對) 미군병사 사이에서 가끔 일어나는 분쟁을 처리하기 위한 군법회의에서 통역할 일이 가끔 있었다. 배심원, 재판장, 검찰의 역할이 분명했고, 인종을 초월해서 공정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에게서 공정하고 정확한 통역을 약속받는 서약의 자리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둘째는 한국인 종업원의 인사관리, 그리고 소속부서와의 갈등해소에 협조하는 일, 셋째는 K.S.C 대대본부와의 Coordinator(조정자) 역할이 큰 몫이었다. K.S.C와의 협조 중에서 보급품의 원활한 조달과, 종종 일어나는 사상자 처리가 중요한 일이었다. 급한 신규사업을 위해 갑자기 인력이 필요하면 예비사단을 통해 인접 시,군(횡성군, 원성군, 충주시 등 수복지구)에서 모집된 K.S.C요원을 부대로 데리고 오는 일도 있었다.
먼저 지시된 군청에 가면 해당 면사무소의 안내를 받는다. 아버지, 남편, 형님, 동생을 보내는 자리에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측은하기 짝이 없다. 이 짓 좀 안 했으면 하는데 도리가 없다. 트럭에 싣고 떠나는 자리는 또 울음바다가 된다. 지금 평화 시에는 2~3시간 내에 족히 도달할 거리인데, 그때는 생이별로 생각되었던 시대다.
대암산 주둔 때는 비교적 주변이 정리가 되고 많은 전방부대가 곳곳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뢰가 비교적 잘 제거되어 있었으나, 부대가 화천 저수지 북방 「군도리」에 이전한 후에는 달랐다. 새로 개설된 도로와 부대 진지 외에는 지뢰투성이였다. 전쟁 중 우군, 적군이 매설해 놓은 땅에 박힌 무기는 전혀 처리되지 않았다.
집 생각이 간절했던 K.S.C요원,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야밤에 몰래 고향으로 도주하다가 지뢰밭에서 희생되었다. 폭사하거나 발목이 날아가 피투성이가 되어 부대로 다시 기어오거나 했다. 거기에도 비극, 참극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끔 스치다 마주치면 “통역님, 저 집으로 좀 보내주세요, 첫딸이 이번에 시집가는데 애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슈” 또는 “아버지 3년상 탈상인데 꼭 가야합니다.” 한다. 눈물겨운 호소다. “부대장에게 이야기 해보세요. 나는 그런 권한이 없어요”라고 말하면 “부대장에게 이야기하면 기합 받아유.” 한다. 항상 같은 말들이 오가는 것이었다. 전쟁은 이처럼 냉혹했고, 계엄령은 이토록 인간을 구속하고, 때로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괴물이었다.
때로는 K.S.C와의 업무협조가 재미있을 때도 있었다. 미군이 직접 식량 배급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정량을 지급한다. 한국군과는 전혀 달랐다. 그걸로 하루 세 끼 먹이고도 쌀, 콩, 밀가루가 남는다. 그 남는 식량을 모았다가 2주에 한 번씩 춘천, 또는 원주로 싣고 가서, 고추장, 된장, 간장 그리고 김치와 교환해 오는 것이다. PX사업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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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명 지게부대인 K.S.C요원들이 군수물자를 지게로 져서 나르고 있다. ⓒ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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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라는 취지로 가끔 따라 갔었는데, 어떻게 교환하고 얼마를 받아오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모처럼 그나마 문명이 존재하는 곳에 온 것만 해도 즐겁고 신기했다. 김치, 깍두기, 된장국을 실컷 먹고 가는 것이 낙이었다. 갈 때는 마늘, 김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이를 닦고 또 닦고, 껌까지 몇 차례 씹으며 귀대하는 것이다.
끝으로 가장 핵심적인 일은 우리 부대 직속 직원과 K.S.C 본부 중대 인원에 대한 봉급대장(俸給臺帳)을 작성하는 것이다. 꼬박 3일 동안 「언더우드」 타자기에 매달려 성명, 직명, 계급, 금액을 A4용지에 기입 작성한다. 부대장의 서명을 받아 월말에 10군단 경리단에 내려가서 돈을 타 가지고 와 각 부대별로 분출(分出)하고, 대대본부 직원에게는 한국인 담당 장교인 Stevens 중위나 S-2 선임하사 입회하에 내가 일일이 손에 쥐어주는 봉급 지급 절차를 취했다.
1953년 초 화폐개혁 전까지는 극심한 인플레 때문에 개개인의 봉급 다발이 꽤나 두툼해서 작업이 많았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데 있어서 친하게 지내야 하는 상대는, 나의 직속상관을 제외하고는 첫째, 식당(Mess Hall) 선임하사, 그리고 피복 등의 개인장비를 불출하는 보급담당과 선임하사이다. 이들에게 점수를 따 놔야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또 가끔 외부에서 손님이나 친구가 오면 식사대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철철이 옷을 갈아입을 때나 신발을 바꿀 때, 자기 사이즈에 맞는 것을 얻을 요량이면, 보급담당과 선임하사의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특히 재고 중에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으면 보급창에 가서 구해다 줄 정도로 친숙해야 한다.
가끔 후방에 갔다 올 때, 간단한 선물을 사서 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부대에 소속돼 있는 한국인 직원의 봉급을 인상해 주는 일이며(물론 규정에 의해 지급이 되지만), 특진도 나의 재량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에 선심을 썼다. 미국 사람들은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인상(Raise)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부임할 무렵, 우리 부대의 주요 프로젝트는 양구 전, 후방 일대의 보급로 유지관리, 그리고 대암산을 가로질러 펀치 볼(오목한 지형 : 원어는 주스 또는 과일화채를 담는 오목한 그릇, 하와이 호놀룰루 근처에 국립묘지가 있는 공원의 이름)에 이르는 주(主) 저항선 일대의 도로 개설과 도로 확대에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B중대는 미군 105mm 포병대의 진지 구축에 매달렸다. 적의 포화가 도달하는 지점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장교를 비롯한 희생자가 종종 발생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인민군 장교, 또는 고급 하사관 위장(僞裝)을 한 특수침투조(당시 KLO라 부름)가 적기가(赤旗歌)를 소리 높이 부르며 미군 트럭에 실려 대암산을 넘어 간다.
그러나 한 번도 다시 실려 돌아오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 침투 후에 죽거나, 또는 임무를 마치면 해안 쪽으로 철수하는 건지, 우리 쪽에서는 당당하게 귀환하는 그들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C중대의 많은 인원이 숯을 굽는데 동원됐다. 전방 벙커 진지는 겨울에 난방 문제가 심각하다. 연기 때문에 적에게 노출될 수도 있고, 포탄에 맞으면 불바다가 되기 때문에 기름을 땔 수가 없다. 여기에 우리나라 참숯이 안성맞춤이다. 전방의 그 무성했던 수림(樹林)은 포탄으로도 망가졌지만 특히 숯을 굽는데 삼림이 많이 훼손됐다.
현재는 그곳도 산림이 우거져 있다. 그때로부터 60여년 만에 약 2세대에 걸쳐 숲이 제자리에 돌아온 셈이다.
